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 7일(음) 오늘의 역사,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타계

윤의사 2022. 2. 7. 18:48

고려 인종 때의 유학자이자 정치가,

<삼국사기>를 펴내 더 이상 중국이 아닌 우리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고, 고려의 역사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6명의 임금을 모시며 유학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자 힘썼고, 묘청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자는 입지, 호는 뇌천, 시호는 문열이다.

 

김부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중국의 유교 경전들을 두루 읽으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부식은 벼슬에 나서 임금에게 직접 유학을 강의하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발달된 송나라 문물을 접해 견문을 크게 넓혔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이자겸이 신하의 도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김부식은 이자겸을 비판하여 잘못을 바로 잡았다.

한편 김부식은 외교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송나라의 뛰어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사적으로 강한 여진과 관계를 좋게 해 균형을 유지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김부식을 가리켜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학문에 막힘이 없는 해동에서 제일가는 학자라고 그의 책에 소개하였다.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다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고려 사회는 크게 흔들렸다. 이때 승려 묘청이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서울을 서경(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서경 천도를 반대하고 묘청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결국 서경 천도 운동은 없던 일이 되었고,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원수로서 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먼저 묘청과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 백수한 등을 반란군과 연결되었다며 처형하였다. 그 뒤 서경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일로 김부식은 최고 벼슬자리에 올랐고, 왕권은 더욱 안정되었다.

 

<삼국사기>를 펴내다

김부식은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뜻을 받들어 <삼국사기>편찬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145년 총 50권의 <삼국사기>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한나라의 사마천이 지은 <사기>를 본뜬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전한다.

김부식은 역사라는 것을 정치적 교훈과 도덕 의식을 배울 수 있는 학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교 이념에 견주어 왕들의 행위와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였다. 또한 역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신비로운 요인보다는 인간의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이전의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합리적인 역사관을 보여주어, 한국의 역사관을 한층 발전시켰다.

오늘날 삼국시대에 관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삼국사기>의 가치는 매우 높다. 김부식은 이밖에도 <예종실록><인종실록>을 펴내었다.(사진 출처:힐링의 '역사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