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 10일(음) 오늘의 역사, 부석사 창건

윤의사 2022. 2. 10. 18:42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하던 시절, 선묘라는 아가씨가 의상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자신을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던 선묘를 두고 떠나 버렸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는 사랑하는 임이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한편 의상은 신라로 돌아온 뒤 화엄종을 알리기 위해 영주의 봉황산에 절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 채 절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하늘에서 의상을 지켜주던 선묘가 바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사람들을 겁주어 달아나게 하였다. 

덕분에 의상은 무사히 절을 지을 수 있었다. 이 절이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이다. 

선묘가 공중에 3번이나 띄웠다는 커다란 바위는 아직도 무량수전 서편에 있다.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현판
선묘

 

부석, 실제 끈이 밑을 통과한다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많은 절을 짓고 뛰어난 제자들을 길렀다. 일생동안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며 살면서 잘못된 일이라면 임금에게도 쓴 말을 하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의상은 열아홉 살 때 경주 황복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도중에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혔다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0년 뒤에 다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의상은 당나라에 8년간 머물면서 당시 고승인 지엄에게 화엄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던 중 당나라가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대비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열다

의상은 신라에 돌아온 뒤 자신이 당나라에서 배운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화엄종을 열었다. 화엄종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무엇보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의상은 화엄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팔공산 미리사,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가야현 보현사, 계룡산 갑사 등의 절을 지은 것으로 전한다.

 

3천 명의 제자들을 길러내다

의상은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배워 깨우치기를 권하였다. 바로 창의성을 중요시한 교육이었다. 또한 언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것과 검소하게 살 것을 강조하였다. 스스로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 평생 몸에 걸친 옷 한 벌, 밥 그릇 한 개, 물병만을 가지고 다녔다. 이러한 의상의 사상과 인품은 널리 알려져 중국에서도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

의상이 불교의 발전을 위해 세운 공이 크자 문무왕이 땅과 노비를 내렸으나, 의상은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며 받지 않았다. 의상이 길러낸 제자는 3천여 명에 이르며,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이 대표적인 10명의 제자이다.

 

왕의 잘못을 훈계하다

문무왕이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동원해 새 성을 쌓고, 다시 높은 세금을 매겼다. 의상은 백성들의 불만이 높은 것을 알고 문무왕에게 쓴소리를 하였다. 임금의 다스림이 어질지 못하면 성을 쌓아도 소용없다는 의상의 말에 문무왕은 성쌓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의상은 임금이 나라일을 잘못하면 잘못됨을 지적해 고치게 만드는 나라의 큰 스승이었다.

 

부석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