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 11일 오늘의 역사,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날

윤의사 2022. 2. 11. 19:06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해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시해로 국내에서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군과 의병들의 대치 상황을 틈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세자와 함께 궁녀들이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일본군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아관이란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의 준말이고, 파천은 임금이 궁궐을 떠나서 피한다는 뜻이다.

이완용과 이범진 등 친러파들은 혹시 모를 일본의 저항을 대비하여 인천항에 머물던 러시아군과 무기를 공사관으로 옮겼다.

아관파천으로 친러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 등 많은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에게 이권이 넘겨지자,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들은 조선에 대하여 금광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빼앗아갔기에, 한반도는 열강의 잇권침탈장이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자,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것을 조선 백성들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떠난 지 1년만인 1897년 2월 25일에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무너진 나라의 체면을 살리고자 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자주 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라 하면서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그리고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地契 : 대한제국시대에 토지의 소유권을 증명하던 문서)를 발급하는 등

근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세우는 한편, 각종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는 등 상공업의 진흥책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권층의 반대와 열강의 간섭으로 성과는 아주 미미하였다.

구 러시아 공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