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박물관 58

(윤봉길의사기념관)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윤봉길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전 축하 기념식에서 단상 위에 도열하고 있는 시라가와대장을 비롯한 일제 수뇌부를 향해 수통 폭탄을 던져 대한민국의 민족혼과 독립에 대한 결의를 세계에 알린 영웅이다. 1908년 6월 21일생인 윤봉길의사는 단심 재판을 받고 의거 1년도 되지 않은 1932년 12월 19일에 순국하셨다. 이러한 윤봉길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삶과 업적을 알리고자 국민들의 성금으로 서울시 서초구 양재시민의 숲(매헌시민의 숲으로 개명 예정) 안에 매헌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현관 로비에 들어서면 태극기 앞에 윤봉길의사 좌상이 있으며, 좌상 앞에 어록비가 있다. 배경의 태극기는 윤봉길의사가 1932년 4월 27일 한인애국단 선서식 ..

(윤봉길의사기념관)문학가 윤봉길의사

3.1운동의 영향은 윤봉길의사에게도 다가왔다. 학교에서는 오직 일본 사람 아래 조선 사람을 두고 그 사람들의 심부름꾼으로 양성할 목적으로 단지 일본글과 일본말, 그리고 간단한 산수를 가르치는 교육을 받기싫은 윤봉길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윤봉길의사는 , , 잡지를 읽으면서 스스로 배움을 익혀 나갔다. 그리고 윤봉길의사는 집에서 2km쯤 떨어진 가막고개(까마귀가 많이 모여있다고 하여 까마귀 고개로도 불림)에 있는 '오치서숙'을 운영하는 성주록 선생을 찾았다. 성주록 선생은 성삼문의 후손으로 학문이 깊고 인품이 훌륭하여 고을에서는 이름이 있는 선비였다. 윤봉길의사의 뜻을 확인한 성주록 선생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에서 시작하여 ..

(윤봉길의사기념관)문학가 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촉시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와 ‘27일 신공원에 답청하며’, ‘백범 선생에게’ 2편의 유시(遺詩)를 남겼다.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를 앞둔 비장함과 자식 사랑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너무나 선명하게 담겨 있는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란 시의 표제가 말해주듯, 의혈남아 매헌의 자식 사랑의 진수와 아버지로서의 소망이 진한 울림과 공명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매헌은 자식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위인을 거명해 놀라운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피력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듯이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

(윤봉길의사기념관)문학가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거사를 행하기 전 유촉시(遺囑詩)를 남겼다. 유촉시는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거나 당부하는 글이다. 윤봉길 의사하면 홍커우공원에서 1932년 4월 29일 수통 폭탄을 단상에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죽였다. 이 의거는 장개석총통을 비롯한 중국인들을 감동시켜,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중국인들의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1943년 카이로 선언의 토대를 이루어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거사를 행하기 전 고향에서 계몽운동가로 백성들을 지도하여 독립사상을 주지시켰다. 또한 문학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중 유촉시인 ‘청년제군에게’는 일종의 광복가(光復歌)로 매헌은 조국이 처한 암울한..

화가의 사람, 사람들

서세옥을 '아우'라 부르며 성북동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변관식은 호가 소정(小亭)으로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에게 서화를 배웠다. 1923년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와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7년 이후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사생으로 소정화풍을 다졌다. 우리 산천의 향토색 짙은 풍경을 강인하고 웅장한 한국의 자연미로 혀상화하여 소정의 산수화 양식을 구축했다. 1954년부터 성북구 동선동에 '돈암산방'에서 작업하였다. 성북구립미술관은

화가의 사람, 사람들

성북구립미술관은 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수묵추상의 선구자인 산정 서세옥(1929-2020)을 중심으로 성북 지역의 주요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2020년 타계한 서세옥 작가의 유족들이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한 서세옥 작품 및 컬렉션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한국 문인화의 정신과 전통을 잇는 마지막 세대의 한국 화가로 불리는 서세옥 작가는 예술적 정취가 가득한 성북구에서 60년 이상 살면서 손재형, 김용진, 변관식 등과 교류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25점의 작품 중 12점이 서세옥 작가가 소장한 컬렉션에서 성북 지역과 관련된 예술가들의 작품이다.(설명문 참고) 오늘은 주로 서세옥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3층에서 전시되는 작품으로 작가의 점과 선의 수묵 추상 대작이 선보인다. 성북구립..

원주 뮤지엄 산

김종렬은 길에서 주운 자연의 오브제인 돌을 변형시켰다. 단단한 돌에 구멍을 내어 쇠를 꽂으니 개미의 형태가 되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돌이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는 개미로 다시 태어났다. 작가의 손길로 평범한 돌이 의외의 모습으로 변했다.(설명문 참조) 오브제는 1917년 마르제 뒤샹에 의해 제기된 선택된 대상이라는 뜻이다. 경주의 신라고분을 모티브로 만든 스톤 가든, 건축가 안도타다오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한국적 선의 아름다움을 9개의 스톤마운드로 구현하였다.(설명문 참조) 조지시걸의 '두 벤치의 커플 조각'이 스톤가든에 있다.

원주 뮤지엄 산의 착호갑사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대한민국이 골치가 아프다. 특히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를 멧돼지가 한다고 하여 멧돼지를 전문으로 잡는 포수가 나타났고, 멧돼지를 잡는 데 군인까지 동원되고 있다. 옛날에는 호랑이 때문에 골치아팠다. 조선은 호랑이의 나라였다.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는 한반도의 호랑이를 잡기 위하여 1237년 9명, 1277년 18명의 원나라 착호인을 파견했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도 호랑이는 여전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랑이 관련 기록은 937회이며, 피해자는 3,989명이었다. ​태조 때는 왕의 집무실(근정전) 뜰 안에 호랑이가 들어왔고, 선조 때는 창덕궁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기도 했다. ​최남선은 우리나라가 호랑이 관련 이야기가 많다고 하여 ‘호담국(虎談國)’이라 하였다. 호랑..

(윤봉길의사기념관)윤봉길기념관

윤봉길기념관에는 이봉창의사와 관계된 자료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봉창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가는 히로히토 일본국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10일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윤봉길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의지를 더욱 굳혔다고 한다. 상하이 의거 이틀 전, 윤봉길 의사가 쓰신 유서와 이력서,(보물 제 568호, 국립중앙박물관) 자신의 사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한 유서이며, 마지막 장에 자신의 유족을 적었다. 유서를 쓰실 때 윤봉길의사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윤봉길의사는 의거 전에 훙커우공원을 답사하며 시를 남기셨다. 김구선생의 시계는 2원이고, 윤봉길의사의 시계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