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박물관 58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90주년 '지하철 사진전'

4월 29일은 매헌윤봉길의사께서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를 결행하신 지 9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4월 5일부터 현재까지 신분당선 전동차에 '매헌윤봉길의사 지하철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신분당선을 이용하는 시민들께 윤의사님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신분당선을 운영하는 20개 전동차 중 1개 열차에서 열리기에 아쉬운 점이 많다.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보통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많은 사람들은 휴대폰에 집중하기에 홍보효과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용객 중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빌어본다.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북한의 폄훼한 평가

매헌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에 대한 북한 평가는 굉장히 편협한 편이다. 즉 1932년 에 발표됐던 김단아의 논지는 '조선=한민족을 식민 지배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폭탄을 던져 그 앞잡이들을 처단한 것은 잘한 행동이었으나, 그 '개인적 테러'로는 민족의 해방을 실현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일제의 탄압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 쓰고 있다. 먼저 '테러'란 표현을 쓰고 있다. 에는 '테러'를 '주권 국가 또는 특정 단체가 정치, 사회, 종교, 민족주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폭력의 사용을 협박함으로써 특정 개인, 단체, 공동체 사회, 그리고 정부의 인식 변화와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는 상징적, 심리적 폭력 행위의 총칭'이라고 나와 있다. 매헌윤봉길의사가 ..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90주년 기념식

2022년 4월 29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서초구 매헌로 99 시민의 숲에 위치한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광장에서 매헌 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10시 30분부터 시작해 윤봉길의사 시극 및 시낭송, 서초구청에서 제작한 매헌윤봉길의사 영상 상영등의 식전 행사가있었다. 11시부터 김동건 전 KBS아나운서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은 국방부 의장대의 윤 의사 사진 영정 입장에 이어 공군 군악대 반주에 맞춰 국민의례의 순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종찬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의 개회사, 명노승 기념 사업회장의 기념식사가 이어졌다. 김부겸 국무총리의 기념사와 이성섭 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의 약전봉독으로 이어졌고, 윤봉길함 정창식 함장의 윤봉길의사가 "청년 제군에게 남긴 시"라는 유시 봉독이 있..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90주년, 백범기념관에서 시계 기증

어제(4월 25일)는 뜻깊은 날이었다. 백범기념관 김미 관장(백범 김구 선생 손녀)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의거직전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간에 교환한 시계를 복제해 기증하는 날이었다. 그런 까닭에 매헌윤봉길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국회의원이 기념관을 반문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서로 만나 격려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김미 관장은 김구 선생의 자제인 김신 전국회의원이자 교통부장관의 외동딸이다. 윤주경 의원은 매헌윤봉길의사의 장남인 윤종님의 딸이다. "선생님, 제 시계는 6원짜리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인데, 저는 1시간 밖에 쓸 수 없으니 바꿔 차시지요.” 라고 말씀하신 매헌윤봉길의사의 육성이 들리는 듯 하다. 상하이 홍커우의거의 두 주역인 김구 선생과 매헌윤봉길의사의 후손이 90년 후 다..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매화꽃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데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6시였다. 매헌은 무장한 헌병들과 함께 유치장을 나섰다. 7시가 넘어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에 도착하였다. 총살형을 집행할 10명의 헌병과 집행관이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토 검찰관이 매헌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아직은 힘이 없어 외세의 지배를 받지만 머지않아 독립은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대한 남아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매헌은 십자로 된 형틀에 묶였다. 일본 헌병들은 매헌의 눈을 가리고 바닥의 거적에 무릎을 꿇렸다. 7시 40분,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매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의혈남아로 미소를 남기며 생을 마쳤다. 매헌의 집행 소식 후 일본은 ‘시신을 인..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일본의 심장을 멈추게 하다

4월 29일, 김구와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니 일곱 시를 알리는 괘종이 울렸다. 매헌은 가지고 있던 시계를 김구에게 건넸다. “선생님, 제 시계는 6원짜리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인데, 저는 1시간 밖에 쓸 수 없으니 바꿔 차시지요.” 김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구는 수통형과 도시락형 폭탄을 매헌에게 전했다. 그리고 택시를 불러 매헌을 배웅했다. 매헌은 택시비를 빼고 나머지 돈을 모두 김구에게 주었다. “나중에 지하에서 웃으면서 만납시다.” 김구는 목이 메여왔다. 매헌도 차 안에서 인사를 하였다. 마음이 바쁜 매헌이었지만 그날 따라 차는 천천히 가는 듯 하였다. 이윽고 홍커우공원에 도착하였다. 시계를 보니 7시 50분이었다. 일본 경찰은 보이지 않고 중국인 경비만 있었다. 매헌이 ..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의거 직전 윤봉길 의사

매헌은 낮에는 채소장사도 하였다. 채소장사를 하면서도 신문은 늘 구독하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였다. 1932년 4월 20일, 매헌의 눈이 커졌다. 바로 기사 때문이었다. 일본 국왕의 생일인 4월 29일 천장절을 맞아 홍커우공원에서 상하이 점령 승리를 기념하고 축하 행사를 할 예정이니 일본인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이날 참석자들은 일장기, 물통, 도시락 이외의 물건은 가지고 입장할 수 없다고 한다. 매헌은 신문을 가지고 김구에게 갔다. “선생님,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일본의 침략을 막고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시간입니다.” “맞네. 하지만...”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한다고 하니 막혔던 가슴이 뚫리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윤군과 같은 ..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90주년, 현판을 한글세대에 맞게 교체

매헌윤봉길의사의 삶과 업적을 올바로 알리고, 농촌계몽과 의열 투쟁을 위한 애국애족의 나라사랑 정신을 선양하고자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1988년 12월 1일에 국민들의 성금으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2016년 1월 1일부터 기념관이 국가보훈처 소유로 이관되어 이를 계기로 2017-2018년에 걸쳐 전시 시설 현대화 작업을 진행하여 건립 30주년인 2018년에 새롭게 재개관을 하였다.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을 맞아 한문으로 된 현판을 MZ세대에 맞춰 한글로 교체하였다. MZ세대는 이곳을 지날 대마다 기념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개선하고자 34년 만에 현판을 90주년을 맞아 교체한 것이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중국으로 향하다

봉길은 신의주에서 시조사 기자인 이흑룡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기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가족 누구에게도 집을 나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서울역에 도착한 봉길의 발길은 이미 신의주로 향하고 있었다. 곧바로 경의선에 몸을 실은 봉길은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들었다. 봉길의 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의주행 열차는 밤새 달렸다. 봉길이 눈을 뜨자 아직 신의주 도착 전이었다. 봉길은 고향 친구인 황종진에게 편지를 썼다. 황종진에게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리면 자연 집에도 알려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일일이 여삼추(一日 如三秋 :하루가 3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말로 몹시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가르킨다)라는 말이 있듯이 어제는 정말 저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듯 합니다. 이 편지를 ..

(윤봉길의사기념관) 묘지팻말사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들어서면 중앙홀 왼쪽에 벽화가 보인다. 1992년 4월 29일에 설치한 일랑 이종상 화백의 작품으로 윤봉길의사 생가 뒤뜰의 대나무로 만든 붓으로 그린 그림이다. 사진의 그림은 그 중 일부이다. 윤봉길이 오치서숙에서 공부를 하다가 바람을 쐴겸 산자락으로 산책을 나섰다. 이때 숨을 헐떡이며 공동묘지 비탈길을 내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공동묘지에서 뽑아온 묘지팻말이 한 아름 안겨있었다. 한, 둘이 아닌 공동묘지의 모든 묘지팻말을 뽑아온 듯 하였다. 그는 윤봉길에게 다가와 물었다. "글을 아십니까?" "예, 압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윤봉길의 말이 끝나자 그는 안고있던 팻말을 윤봉길 앞에 내려놓았다. 윤봉길이 보니 공동묘지에서 뽑아온 팻말이 틀림없었다. 묘지 주인의 이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