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박물관/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매화꽃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윤의사 2022. 4. 25. 19:46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데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19321219일 오전 6시였다. 매헌은 무장한 헌병들과 함께 유치장을 나섰다.

7시가 넘어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에 도착하였다.

총살형을 집행할 10명의 헌병과 집행관이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토 검찰관이 매헌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아직은 힘이 없어 외세의 지배를 받지만 머지않아 독립은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대한 남아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매헌은 십자로 된 형틀에 묶였다. 일본 헌병들은 매헌의 눈을 가리고 바닥의 거적에 무릎을 꿇렸다.

740,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매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의혈남아로 미소를 남기며 생을 마쳤다.

매헌의 집행 소식 후 일본은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오지 않아 가나자와 시립화장장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의 처분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고 했으나, 1946년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매헌의 시신을 화장하지 않은 채 육군 묘지 아래 사람들이 다니는 길 아래 암장하였다.

일본 가나자와 윤벙길의사 순국비

 

<조선일보><동아일보>를 통해 매헌의 죽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혈서와 진정서를 통해 시신을 인수하고자 했으나, 일본은 가족에 대한 고문과 고통, 그리고 학대로 답했다.

매헌이 소원한 대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으며, 한국은 독립하였다.

독립하기 2년 전인 19431122일 카이로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매헌의 의거를 높게 평가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121일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문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라는 특별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감옥에서 보낸 이강훈, 박열, 서상한은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고자 하였다. 육군묘지와 인근의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졌으나 헛수고였다. 이때 관리사무소의 기무라 주지가 귀뜸을 하였다.

카이로선언기념비(출처:김종수)

카이로에 있는 카이로 선언비

저기 쓰레기 소각장을 파보시오.

나는 1940년에 이곳에 왔는데 윤봉길이 8년 전에 총살되어 저 쓰레기 소각장에 매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가끔 저곳에 향을 피우곤 했지요.”

이때 가나자와 9사단의 헌병대원이었던 두 사람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설마 시신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 아래에...”

이강훈과 박열, 서상한 등 100여 명은 의심을 하면서 땅을 팠다.

1m 정도 팠을 때 관이 나오고 윤봉길 의사의 수의와 구두, 머리카락 등이 나왔다.

세 사람과 100여 명의 발굴단은 일본의 행위에 분통을 터뜨렸다.

세 사람과 100여 명의 발굴단은 묵념을 올린 뒤 수습을 하였다.

수습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귀국하여 194676

국민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져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4년 만에 그토록 사랑한 조국에 잠들게 되었던 것이다.

효팡공원 삼의묘에 안장된 매헌윤봉길의사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