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
최근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 역사적인 논쟁이 뜨겁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만나게 된다. 엄상궁은 1897년 은(垠)을 생산한다. 원래 후궁의 아들이라 적손이 될 수 없었지만, 손이 귀한 조선왕조이다 보니 적손이라는 의미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엄상궁도 왕자를 생산한 덕분에 정1품의 빈이 되었다. 영친왕이 11세 되던 1907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실의에 잠긴 고종을 위로한 이는 소주방 나인 출신의 복녕당 양씨,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고종은 딸을 얻으니, 이가 곧 덕혜옹주이다. 고종의 덕혜에 대한 사랑은 한없었다. 5세 되던 해에는 준명당에 유치원을 세우고, 동년배 5-6명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