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밥상 위의 한국사

호두나무

윤의사 2016. 9. 28. 19:58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다.

호두나무도 긴 장대를 이용하여 내리치면서 녹색의 껍질을 벗겨 수확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언제일까?

호두의 원산지는 지금의 이란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두 방향으로 전파되어 나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나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서 캘리포니아 지방에까지 이르렀고,

다른 한 방향은 동남 아시아를 지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된다.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지방 4개 촌의 민정 문서인 신라 향촌 장적(新羅 鄕村 帳籍:일명 신라 장적

또는 정창원 문서, 1933년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13매의 경전 중 파손된 《화엄경론》의 책을

수리할 때 발견되었다.)에 호두나무 등의 나무 그루수가 3년 동안 늘고 줄었는지의 변동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 당나라를 오고 가던 사신이나 무역 상인, 유학생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가 호두나무의 시배지라고 한다.

신라 장적에서 말하는 호두보다 후대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신라 장적의 기록이 더 믿을만하다 하겠다.

광덕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400년 된 호두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398호로 높이 18.2m 에 이른다.

고려 충렬왕 16년(1290) 영밀공 유청신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호두나무의 열매와 어린 가지를 가져왔다고 한다.

어린 나무는 광덕사에 심고 열매는 고향집에 심으면서 광덕사가 호두나무의 시배지가 되었다고 한다.

유청신의 본명은 ‘비(庇)’였다.

그런데 몽골 황제가 ‘청신(淸臣)’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죽을 때까지 ‘청신’으로 살았다.

그는 전형적인 매국노였다.

원나라 황제에 빌붙어 원나라에 살던 고려인들과 함께 심왕 고(暠)를 고려의 왕으로 삼으려다가 실패했다. 이것도 모자라 그는 오잠(吳潛)이라는 매국노와 함께 고려를 원나라의 땅으로 만들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이기도 했다. 입성책동은 고려를 원나라의 지방 제도에 불과한 ‘성’으로 편입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원나라에서도 ‘정동성'으로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를 지키려는 충신들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결국 류청신은 반역죄로 처벌될까 두려워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원나라에서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고려사』에 ’간신전‘에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광덕사 호두나무, 원내는 류청신호두나무시식비,

호두나무 우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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