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밥상 위의 한국사

구황작물 고구마

윤의사 2016. 10. 4. 20:15

우리나라의 서민들은 보리를 수확하기 전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하여 나무뿌리나 소나무의 생껍질을 삶아먹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먹지를 못하여 얼굴이 누렇게 변하는 ‘황달’ 증세를 보였다.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기 위하여 풀뿌리부터 소나무 생껍질, 백토,

심지어 199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있었다는 인육(人肉)까지도 먹는 일이 나타났다.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의 ‘만물문’ 을 보면


  정선 지방 어느 골짜기에 이상한 흙이 매장되어 있는데, 주민들이 그 흙을 파다가 먹는다. 음식은 쌀기울 한 말에 흙 다섯 되를 섞어서 떡을 만든다고 한다. 한 사람이 가져와 내게 보이는데, 복령처럼 하얗고 매우 끈적끈적했다. 씹어보니 흙냄새가 조금 났지만 먹을만한 것이었다.


라고 쓰여 있다. 백토에는 미네랄을 많아 함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흙으로 음식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굶주림이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강원도 양구에서는 백토70%에 쌀 30%의 비율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이 떡이 이질과 설사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인육을 먹는다고 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놀란 적이 있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9일의 기사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경성의 각 진제장(賑濟場)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남부의 진제장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끊임없이 도로에다 끌어내어 놓는데 그 시체를 모두 다른 굶주린 백성들이 베어내어 가지고 갑니다. 당초 진제장의 일에 대해 미리 조처를 하여 하리(조선시대에 행정실무를 맡아보는 하급 관리)들로 하여금 농간을 부려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사사 건건이 지체되어 있으니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남부 진제장의 감진관 등을 우선 심문하여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그 나머지를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매우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이러한 보릿고개 시절의 힘겨운 생활을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농작물이 바로 고구마와 감자이다.

백성들의 식량을 구해준 작물이라고 하여 고구마와 감자를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고 한다.
  원래 고구마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다.

이것이 서인도제도를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콜럼버스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이 필리핀으로 전래시켰다. 마닐라에 전파된 고구마는 당시 교역항이었기에 중국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중국 상인 중 진진룡이라는 사람이 1594년 고구마를 숨겨 중국으로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원래 고구마의 외부 반출은 금지되었기에 숨겨서 중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의 푸젠성에서 재배되던 고구마는 유구국(오늘날 오키나와), 타이완, 일본 본토로 전해졌다.

일본 본토로 전해진 고구마가 쓰시마섬으로 전해졌다.

고구마는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 39년(1763) 일본(日本)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온 조엄이 쓰시마섬에서

고구마 가꾸는 법과 저장법 등을 배워가지고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왔다.

그러나 고구마의 재배는 활발하지 못했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 동래부사 강필리가 씨고구마를 구해서

부산의 절영도(오늘날 영도)에 심으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강필리는 『감저보』라는 고구마 재배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맛있는 군 고구마


 순조13년(1813)에 김장순과 선종한이 초기에 제주도와 동래 지방에서만 재배하던 고구마를 9년간 전라도 지방에서 재배하면서 터득한 기술을 『감저신보』를 쓰면서 서울에서도 고구마 재배를 성공시켰다.

강필리의 『감저보』가 중국의 재배법을 그대로 기술한 것에 비하여 김장순과 선종환의 『감저신보』는 우리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재배법을 기술하여 고구마의 보급에 힘쓴 농학 서적이다.

순조 34년(1834)에 실학자인 서유구는 『종저보』를 저술하여 고구마가 전국적으로 재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류중림은 고구마가 전래되자마자 매우 중요하게 여겨 『증보산림경제』에서 고구마를 심을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왜인들은 먼 나라 사람에게 (고구마로) 음식을 준다.

그것을 보니 (왜인들은 고구마를) 아침·저녁의 식량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귀한 물건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찌 적극적으로 종자를 구하여 전국에 널리 심지 않으려 하는가.

오직 청인과 왜인들만 그 맛과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고구마는 흉년을 구하는 데 으뜸이다. 마땅히 둔전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살곶이(箭串)나 밤섬(栗島)에 심게 하면 많이 심을 수 있다” 라고 고구마의 재배를 권장하였다. 정부에서도 고구마의 식량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정조 22년(1798)에 고구마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마의 재배는 점차 확대되었다.


살곶이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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