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1

비틀스

1970년 4월 10일, 비틀스가 해체되었다. 비틀즈의 시초는 1957년 존 레논이 조직한 고등학교 밴드 '쿼리멘'이다. 이후 몇 번의 밴드 멤버를 바꾸다가 폴 매카트니와 그의 친구 조지 해리슨이 비틀스에 가입했다. 1962년 링고 스타가 들어오면서 최종적으로 밴드가 완성됐다. 비틀스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밴드로서 인정받았다. 스키플과 비트, 1950년대 로큰 롤을 뿌리로 두며, 클래시컬한 음악과 전통 팝의 요소들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녹아냈다. 처음 그룹 이름은 비탈스, 실버 비트, 실버 비틀, 실버 비틀스로 했다가 비틀스가 되었다. 비틀스는 1960년대 초반 함부르크의 클럽을 전전하며 실력을 쌓은 이후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Love Me Do'라는 ..

독립운동가 손병희

오늘은 천도교(동학) 지도자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 종교와 교육 사업으로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다른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최대 규모의 한민족 독립 운동인 삼일 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민족혼을 일깨워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이루었다. 본명은 응구, 호는 의암이다. 손병희는 어렵게 자라 어려서부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1882년에 동학을 알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최시형의 바로 밑에서 고된 수행을 하였다. 손병희는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 신원 운동을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

신문의 날

오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일간지이며, 최초의 민간신문이고, 한글 전용신문인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과 독립협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1896년 오늘,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된 독립신문은 19세기말 조선시대 말기 시대상을 담아 일반 민중들에게 자유와 민권 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지만 조선말기의 혼란상을 수습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정부가 탄압을 하고, 수구세력의 미움을 받아 발행인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다가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었다. 1957년 언론계는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창간을 기념하고, 신문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간디의 소금행진

영국은 1882년부터 식민지 인도에 불공정하고도 엄격한 과세 정책을 시행하였다. 인도에서 채취한 소금을 영국으로 가져다 가공한 후 다시 인도에 엄청난 세금을 매겨 되팔았다. 소금령으로 인도인은 소금을 직접 만들 수 없었고, 천일염에 손을 대면 체포되었다. 할 수 없이 인도인들은 영국에서 가공한 비싼 소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소금 독점에 반대해 1930년 3월 12일 간디가 소금 행진을 시작했을 때 79명이 뒤따랐지만 387㎞를 걷고 난 4월 30일까지 300만 명이 함께 했다. 소금 행진은 간디의 ‘사트야그라하’ 중 하나였다. 산스크리트어 ‘사트야(진실)’와 ‘아그라하(저항하다)’의 조어인 사트야그라하는 인도 독립과 자치를 주장하던 간디가 1920년부터 불복종 운동 등을 통해 영국에 요구했던 것..

드라마 보다가 도둑맞고 밥 타고

《여로》(旅路)는 1972년 4월 3일부터 1972년 12월 29일까지 211회 방송되었던 KBS 1TV 일일 드라마로 70%라는 높은 시청률이 나온 이 드라마의 처음 제목은 ‘女路’로 ‘여자의 길’을 그렸는데, 방송이 연장되면서 ‘旅路’로 바뀌었다. 주인공 분이(태현실)는 가난 때문에 술집 작부로 일하다가 부잣집의 아들이나 머리가 딸리는 영구(장욱제)의 부인으로 씨받이 겸해서 팔려오게 된다. 신랑이 정신지체장애임에도, 분이는 남편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분이의 진심을 안 영구도 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분이는 시집온 그날부터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권미혜) 사이에서 구박을 받았다. 아들 기웅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과거 술집 작부로 일한 사실로 쫓겨났다. 1952년 6.25..

제주 4.3사건의 주범, 김달삼

제주 4.3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인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대구가 고향이다. 1943년 일본 오사카에 있는 성봉중학교를 졸업 후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에 임관됐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1945년 일본에서 결혼했다.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원래 공산주의자였던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으로 이승진이 이를 이어 받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해방 직후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6년 대구10.1폭동에 가담하여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신임을 받은 후 1948년 4·3 사건 당시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오늘은 대한자강회 창립

대한제국 시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으로 고난의 시간이었다. 이때 나라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을 키워 점진적으로 외세를 막자는 것이요, 의병운동은 무력으로 외세를 막자는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것이 1906년 3월 31일 윤효정, 장지연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자강회는 교육, 산업 등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면서 월보와 간담회를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대한자강회는 고종강제퇴위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되었다. 대한자강회 설립취지서 일부 “무릇 나라의 독립은 자강 여하에 달렸다. 우리 대한이 종전에는 자강지술(自强之術)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우매한 것에 갇히고, 국력이 쇠패(..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유림의 파리장서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김창숙은 33명의 민족 대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유림들을 규합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창숙 선생은 곽종석과 협의하여 1,422자에 이르는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의 유림이 서명하고 김창숙 선생이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3월29일 용산역에서 출발하였다. 김창숙 선생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번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영사관 및 국내 향교에도 배포하였다. 이는 그 주도자들이 당시 유림계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전국적인 연합을 이루고, 이후 유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곽종석 등의 독립청원서는 원본과 발송본 두 가지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오늘은 안중근의사 순국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힐튼 호텔 뒤편을 지나면 백범광장이 나온다.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과 함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백여 계단을 오르면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나온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 성금으로 일본 식민지의 상징인 조선 신궁 터에 세워졌다. 협소한 전시 공간과 시설의 노후화로 40년 후인 201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면서 재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품(遺品)과 사진, 유묵 등이 전시돼 있다. 유묵을 보니, 자나 깨나 오직 나라만 생각한 듯하다. 그는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의 넉 자를 써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

오늘은 이승훈 성생님이 오신 날

기업가에서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을 발전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삼일운동 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본명은 인환, 호는 남강이다. 이승훈은 가난한 시골 선비 집안에서 1864년 3월 24일 태어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열 살 무렵부터 놋그릇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다. 20대에 이미 놋그릇 가게와 공장을 차릴 만큼 꽤 성공하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돈을 빌려 다시 가게와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1901년부터는 평양에 무역 회사를 세우는 한편 서울과 인천을 통해 외국과 거래를 하였다.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굽힌 이승훈은 이탈리아 사람과 연결하여 국제 무역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