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 68

남한산성 장경사

장경사는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다시 건설하면서 건립되었다. 산성을 쌓을 때 전국의 승군을 소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각성선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모집했는데, 숙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절이다. 효종이 북벌운동을 벌일 때에는 이 절에 총섭을 두고 승군을 훈련시키며,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는 국방사찰이었다. 고종 때까지 250여년간 북한산성과 함께 270명의 승려들을 번갈아 주둔시키면서 호국성지의 역할을 하였다. 장경사는 주로 충청도 출신의 승군이 머물렀으며,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로 무기고를 비롯한 절의 건물들을 폭파했으나, 장경사는 피해가 적어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장경사 일주문(평택종주산악회) 장경사 대웅전(평택종주산악회) 장경사범종각, 100년만에 봉은사에서 장경사로 ..

남한산성 암문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이다. 암문은 비밀스러운 통로이다보니 성문보다 규모가 작으며, 지붕이나 누각도 없다. 암문은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 식량이나 무기 등을 성안으로 가져오며, 적을 피해 구원 요청이나,원병이 오는 통로이다. 때로는 적을 기습할 때 군사들이 은밀히 이동하기도 하였다. 암문의 성 안쪽은 옹벽이나 흙을 쌓아 적으로부터 성이 위협당할 때 옹벽이나 흙을 무너뜨려 메꾸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암문은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이후이다. 남한산성에는 암문이 16개 있다. 그 중 본성에는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의 암문은 남쪽에 4개,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있다. (사진 출처:평택종주산악회) 제1암문, 성밖 제1암문(..

남한산성

경기도 성남과 광주에 걸쳐있는 성으로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497m의 청량산을 둘러싼 성은 약 8km이며,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에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성이라고 나온다)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곧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성이라고 전하기도 하지만 발굴 결과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만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터는 보이지 않았다. 청량산의 주변은 급경사를 이루어 방어에 유리하지만, 성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거주하기에도 좋은 편이다. 지금도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관광객들을 상..

둔촌 이집

성남시 중원청소년수련관으로 가다보면 묘역 입구에 둔촌 이집의 신도비가 있다. 둔촌 이집 신도비 둔촌 이집은 성남 출신 인물로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고 애쓴 관리 중 한 명이다.그는 공민왕 때 정치를 좌지우지 한 신돈을 비판했다가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여경북 영천으로 피했다.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개경으로 올라와 판전교시사(고려시대 유교 경전 및 여러 도서의 인쇄 및 보관을 하던 관청)직을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오늘날 성남으로 내려와 여주를 오가며 지냈다.집과 호마저 둔촌으로 바꾸고 시와 학문에 힘썼다.유교집으로 이 있다.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크게 활약하고 있다.광주 이씨로 대표적인 후손은 한음 이덕형이다.이렇게 성장한 배경에는 이집이"금을 광주리로 주는 것보다 경서..

여성독립운동가 황에스더

황에스더 선생은 1892년 4월 19일에 한학자인 황석청의 7남매 중 넷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간레’라고 불리던 황에스더 선생은 어머니가 동생인 신덕을 낳다가 위험에 빠졌을 때, 미국인 홀 의사에 의해 건강을 되찾자 집안 식구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황에스더 선생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스더’라는 세례명에 따라 황에스더, 황애덕, 황애시덕(愛施德)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1904년 두 동생이 모두 학교에 입학한 것에 자극받아 자신도 학교에 가려고 했으나, “10세가 넘은 처녀는 학교를 보낼 필요가 없다.” 라고 아버지가 반대하자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1905년 평양 정진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 정진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10..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

분당에 중앙공원에는 한산이씨의 묘역이 있다. 이색의 4대손인 봉화현감 한원군 이장윤(토정 이지함의 조부)부터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분당과 관련있는 한산 이씨의 중흥조인 이색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성리학자이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함께 3은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하자 벼슬을 버리고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시를 지으면서 지냈다. 고려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6천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저서에 와 등이 있다.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이색은 열네 살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 건너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려로 돌아온 뒤, 공민왕에게 토지 제도의 개혁, 국방 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