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이야기/남한산성

남한산성

윤의사 2020. 5. 24. 15:50

경기도 성남과 광주에 걸쳐있는 성으로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497m의 청량산을 둘러싼 성은 약 8km이며,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 13(673)에 한산주에 주장성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성이라고 나온다)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곧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성이라고 전하기도 하지만

발굴 결과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만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터는 보이지 않았다.

청량산의 주변은 급경사를 이루어 방어에 유리하지만,

성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거주하기에도 좋은 편이다.

지금도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인조 2(1624)에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수리하게 하여

2년 후인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성은 4개의 문과 16개의 암문과 옹성, 행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서가 공사를 총감독하면서 승군을 동원하였다.

승려 각성이 도총섭으로 8도의 승려가 동원되었으며,

이들의 숙식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는데,

장경사만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다.

임금이 행차할 대 머무를 행궁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다.

숙종 14(1688)에 좌덕당(左德堂),

숙종 37(1711)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왕후 등 비빈들이 피난 간 강화도를 청나라가 점령하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며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하문(남문)

지화문

북문인 전승문

동문인 좌익문

서문인 우익문, 인조가 이 문을 통해 삼전도로 갔다.

수어장대와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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