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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생활은?

윤의사 2006. 3. 12. 13:10

“뭬야”로 인기를 모았던 모방송국의 ‘여인천하’에서 세자인 인종이 계모인 문정왕후에게 시달림을 받는 장면이 나와 많은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
또 오래 전에 방송되었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15대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불을 뜨겁게 하여 결국 죽게 하자, 많은 청취자들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문정왕후도 광해군도 왜 그랬을까?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 계승권이 두 번째가 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첫 번째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장남 인종을 괴롭혔으며, 마음이 약했던 인종은 계모지만 문정왕후를 정성껏 보살피다가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와서 임금에 오른 지 9개월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뜻대로 아들인 경원대군을 조선시대의 13대 임금인 명종으로 즉위시켰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왕위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세자에 책봉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왜군의 침입으로 혹시 무슨 불상사라도 날까 하여 선조는 의주로, 광해군은 함경도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에게는 임해군이라는 형이 있었다. 큰 아들이 왕권을 계승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광해군을 자신의 아들처럼 아껴주던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인목왕후가 들어와 아들인 영창대군을 낳자 문제가 생겼다. 광해군보다는 영창대군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정식 부인의 아들이 첩의 아들보다 우선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논란의 와중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불안을 느낀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귀양보냈다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보통 정식 왕비의 아들을 ‘대군’이라고, 후비의 아들을 ‘군’이라 부른다. 정식 왕비의 딸은 ‘공주’로, 후비의 딸은 ‘옹주’로 불린다. 
임금은 하늘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 학생들은 대개 아침 6∼7시 사이에 일어나는데, 그러면 임금의 자격은 이미 없다.
임금이 되려면 우선 일찍 일어나야 한다. 해 뜨기 전인 새벽 5시 전후, 왕은 일어나자 마자 자릿 조반이라 하여 죽 같은 것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다.
세면을 하고 옷을 입으면 왕의 어머니나 대비가 있을 경우에 아침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한다. 아침 문안 인사가 하루 일과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빈틈없이 일과는 계속된다. 왕이 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면 만기(萬機:만 가지 업무)라고 했을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나오면 정전에서 관리들이 기다리는 조회에 참석하였다. 이 곳에서는 나라의 주요한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조회가 끝나면 바로 왕의 공부 시간, 바로 ‘경연(經筵)’시간이다. 왕과 신하간에 학문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유학의 경전도 공부하였다. 그런데 경연을 하루에 세 번이나 하였다.

아침 경연이 끝나면 왕은 아침상을 받는다. 왕은 하루에 두끼의 식사를 하는데 기본 음식이외에 12가지의 반찬이 나왔다. 기본 음식은 국·김칟장류·찌개·갈비찜·전골류 등이며, 12가지 반찬은 도라지·호박·숙주나물 등 삼색 나물과 무생채·구이 등이다. 식사가 끝나면 바로 점심 경연 시간으로 역시 공부 시간, 공부 시간이 끝나면 떠나는 관리, 새로 임명받은 관리들의 인사를 받아야 한다. 왕은 백성들을 위해 일한 것에 대한 칭찬과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어서 각 부대에 전달할 그 날의 암구호를 전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가 싶으면 관리들이 찾아와 경연에 들어가 학습을 하고, 그 날 들어온 상소문이나 건의문을 살펴보았다.
저녁 수라상을 받은 후, 왕의 어머니나 대비전에 저녁 문안 인사를 올린 후에야 겨우 하루 일과를 마무리지었는데, 이미 오후 9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왕은 이때부터 자신만의 한가로운 시간이나 왕비와 다정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둘 만의 시간이란 엄두도 못낸다. 항상 내시와 궁녀들의 감시(?)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왕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풀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취미 생활을 하였다. 오늘날 하키와 비슷한 ‘장치기’를 한다든지, 왕비·궁녀들과 함께 투호를 하면서 상품을 주기도 하였다. 장치기는 서양의 하키처럼 홍(紅)·백(白) 두 개의 공을 양편이 공채로 떠서 자기편의 골문에 먼저 넘겨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서 세종대왕이 왕위를 물리고 들어앉은 아버지 태종과 더불어 장치기 경기를 즐겼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투호놀이는 중국 당나라 때부터 행해졌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에 들어왔다. 넓은 잔디밭이나 대청 등에 귀가 달린 청동 항아리를 갖다 놓고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항아리 속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인데, 화살을 많이 넣는 편이 이기게 된다.
날씨가 좋으면 교외로 나가 사냥을 즐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관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왕의 취미 생활이었다. 그리하여 관리들 몰래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을 하는 왕도 있었다.
그러면 관리들이 권하는 왕의 취미 생활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독서였다. 조용히 유교경전을 읽으면 몸과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 속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책을 많이 읽은 왕은 문집도 만들었다.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성과를 책을 써서 나타냈으니, 바로 문집이다. 그리하여 영조부터 순종까지 문집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당시의 왕은 한 나라의 최고 위치에 있는 신분이지만, 세수도 궁녀들이 해주는 등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운동이 부족하고, 궁녀와 내시의 간섭, 관리들의 끊임없는 감시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지만 각종 병에 시달리는 참으로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오죽했으면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은 자신이 살던 강화도를 그토록 그리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