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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필요했던 외국어는?

윤의사 2006. 3. 13. 11:59
옛날에도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여진족, 거란족 등과 대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외국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통역인이 엉뚱하게 통역하는 일이 있어 고려시대부터는 아예 통역인을 양성하고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는 관청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통문관(通文館)이라 했다가 사역원(司譯院)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에서는 중국어·여진어·몽골어·일본어를 주로 취급했다. 여진어는 청나라가 된 후에는 청학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은 역과(譯科)라는 과거 시험을 거쳐 통역 관리가 되었다. 역과에 합격한 사람은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주어 각 관청의 임시직으로 임명했다.
조선시대에서는 외교 관계 중에서도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아 중국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드높았으며, 후기에는 여진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았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당시 몽골어에 대한 관심을 많이 기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행 또한 중국인(또는 여진인)에게 인정을 받아 출세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을 제외한 다른 민족을 야만족으로 취급함에 따라 그 나라 말을 익힐 중요성도 떨어져 과거 시험에서도 뽑는 인원이 중국어의 1/6에 불과했다.
그 당시 국제 무대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외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우리나라 말로 통역을 했고 우리나라 사신이 다른 나라로 가면 그 나라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보다 큰 나라라는 인식에서 중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중국어가 사용되었다. 이것도 사대주의, 중국중심의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 통역관은 외국어의 통역 뿐만 아니라 선진 문물의 도입에서도 첨병 역할을 하였다. 즉 중국에 가서 과학과 기술을 공부하고, 서양 문물을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데 큰 몫을 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 후기 고종 때 활약한 오경석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북경을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박규수, 유대치와 함께 개화파를 형성해 조선이 국제 무대로 등장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가 중국에서 들여온 《해국도지(海國圖誌)》는 세계 정세를 국내에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박영효와 김옥균, 홍영식 등이 비록 일본에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갑신정변이라는 개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통역관은 신분 계층으로는 중인이지만,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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