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대통령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다.
친일파라거나 독재자라는 등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과에도 불구하고 박전대통령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우리 민족에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불어 넣어 준 인물이다.
이렇게 글을 쓰면 분명 진보쪽에서는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를 바라보면 좋겠다.
대한민국 제5대 ~ 제9대 대통령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18년간이나 장기 집권하였다. 수 차레에 걸친 경제 개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유신 헌법을 만드는 등 독재 정치를 고집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만주로 건너가 1944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를 지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승진을 거듭했으나, 1949년 공산주의자로 찍혀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곧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일하였고, 여러 요직을 거쳐 육군 소장에가지 이르렀다.
이 무렵 4.19 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박정희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걸고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이어 헌법을 뛰어넘는 권력을 가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2년 6개월간 군인 정치를 하였다. 1963년에는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한국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다
박정희는 사회 개혁을 이루는 일부터 강하게 밀고 나갔다. 사치와 향락 산업의 뿌리를 뽑는 한편 가족 계획과 문맹 퇴치 운동도 벌였다. 나아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거듭 추진하고 수출을 늘리는 데 힘썼다. 이를 위해 경부고속국도를 비롯한 여러 고속 국도를 건설해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고, 자동차․조선․석유화학제품 등의 중화학 공업을 적극적으로 키웠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서고 국민소득이 크게 높아졌다. 박정희는 뒤떨어진 농촌을 발전시키는 일에도 힘써 1970년대초부터 새마을 운동을 펴나갔다. 이 운동은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를 내걸고,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며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음했지만,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등 사회가 고르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독재 정치로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 막다
박정희는 1967년에 재선한 뒤 ‘3선 개헌’을 통과시켜 다시 대통령에 오를 수 있게끔 법을 바꾸었다. 이어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게 당선되자, 이듬해 10월에 유신 헌법을 선포하여 영원히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며 일인 독재 체제로 치달았다. 그러자 정치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을 중심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기 위한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의 비판도 커졌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 조치’까지 발동하여 수많은 민주 인사를 투옥하는 등 독재 정치를 밀고 나갔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결국 정권이 위기를 맞은 가운데,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측근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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