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기중 선생은 1873년 7월 7일 경상도 함창현 소암리(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채헌락과 곡부공씨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극오, 호는 소몽이다. 소암리에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고, 의병전쟁이 일어나 채기중 선생은 항일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면 도와줄 만큼 의협심이 강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76편의 한시를 지을 만큼 한문의 경지가 높았다.
1906년 선생은 경상도 풍기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곳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으로 혼란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정체를 숨기고 있어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펼치기에 좋은 곳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1913년 강순필, 한훈, 김상옥 등과 함께 풍기 광복단을 조직했는데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을 4대 강령으로 삼았다. 김상옥은 훗날 의열단원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조선의 쌍권총 김상옥 의사이다.
풍기 광복단은 일본인 부호들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을 습격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함창 주둔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을 이끌던 박상진(1884-1921)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통합하고, 1916년 대한광복단을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전쟁을 펼쳤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채기중은 경상도지부장을, 경주 최부자의 최준이 재무부장을 맡았다. 특히 1917년 ‘대구권총사건’으로 총사령 박상진이 피체된 후에는 대한광복회를 사실상 이끌어갔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등의 독립운동기지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 양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채기중 선생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세금 수송의 우편 마차와 금광의 현금 마차 등을 습격하거나 광산에 잠입하여 군자금 마련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부호들에게 나라를 위해 의롭게 쓰이는 의연금을 지원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또한 부호가 협력을 거부할 경우에는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문도 발송했지만,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1917년 11월 12일 채기중, 임봉주, 강순필 등이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지 않은 경북 구미의 대부호(당시 조선의 10대 부자)이면서 친일행각과 소작인에 대한 착취가 일본인보다도 심한 악질인 전 경상도 관찰사 장승원(1852-1917)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장승원 처단사건은 친일부호 처단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친일파들에게 공포심을 준 사건이다. 장승원은 초대 정부 외무장관과 제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였다.
1918년 1월 24일, 대한광복단의 임봉주, 김경태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에 '사형(처단)선고문'을 직접 읽게 하고서 총살하였다.
그러나 채기중 선생은 1918년 7월 14일 목포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종국의 밀고로 충청지역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박상진, 채기중 등도 피체된 것이다. 이종국은 매국노로 1907년 충남 연산군수, 1908년 경북 영천 신녕군수를 역임하였고, 1909년 신녕군 이등박문추도회를 개최하면서 이등박문을 세계적 영웅이라고 칭송한 자이다.
채기중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방화·살인·강도·강도살인미수·주거침입·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횡령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9월 22일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 판결이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판결이 확정되어 1921년 8월 12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순국하였다.
일제는 1924년 경북선 상주역과 함창역을 잇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채기중 선생의 생가와 마을의 정기를 끊으려고 직선 철로를 곡선으로 바꾸면서 그 앞을 지나가게 할 정도로 선생의 항일전쟁 기운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듯 하다.
1918년 7월 14일 무장 독립운동가 채기중이 일경에 체포되며 시를 써서 결의를 보였다.
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죽겠노라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오만 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읊은 시를 보면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 채기중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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