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1월 7일 오늘의 역사, 김도현 의병장 순절

윤의사 2024. 11. 7. 20:23

우리가 절명시하면 황현 선생을 생각한다.

여기 절명시를 남긴 또 한분이 계시니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 선생이다.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김도현 선생은 1852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마을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호는 벽산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나라가 혼란스러울 것에 대비해 밤낮으로 군사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한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점고회(點考會)라는 일종의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으로 상청리 마을의 뒷산인 검산(劒山, 혹은 검각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둘레가 500m 남짓의 산성을 일가친척 및 소작인들과 쌓았다.

검산성은 지형을 활용하였다. 동쪽으로 하천이 흘러 해자로, 경사가 급한 북쪽을 제외한 남쪽과 서쪽에 높이 1.2m~2m의 성벽을 쌓고 성안에 방어시설과 막사를 마련하였다.

선생의 종숙 김성수가 남긴 문집 <청헌유고(靑軒遺稿)>에 성의 축조 동기가 나와 있다. 동학 난과 일본의 화를 막기 위해 목책과 석축으로 갑오년(1894) 28일 착공해 을미년(1895)8월에 준공했다.’는 것으로 봐 동학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검산성은 후에 의병활동과 항일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통문을 돌리고 영양지역 유생들과 거병을 논의하고, 이듬해 2월 검산성에 창의도총부(倡義都總府)를 두며 봉화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부대는 봉화군 동헌 점령을 시작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聯合義陣)을 조직해 3월에는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대와 태봉전투를 벌여 성과를 거둔 후, 강릉 의병의 도움 요청에 삼척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8964월의 삼척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으로 돌아와 일월산과 검산성에 본진을 두고 진영을 다시 편성했다. 18966월에는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 의진과 연합해 유격전으로 일제에 맞섰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배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유격전으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김도현 선생은 선유어사의 의병 해산 권유를 받고 18961015일 의병을 해산하니, 을미의병으로 거병해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이다. 선생은 의병 봉기를 모의한 1895121일부터 의병을 해체한 1896101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을 날짜순으로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을 남겼다. 이로써 김도현 의병부대는 경북 영양에서 강릉까지 이어져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조약체결의 주역인 을사5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을 보내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상소 투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1월 선생은 포군 5~6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삼남지역의 각 군에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등을 보내어 의병 궐기를 촉구하였다. 거병을 준비하던 중 1907년 봄에 체포되어 달성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 지역 유지들과 옛 영양관아의 객사를 수리해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해 교장으로 교육을 통해 구국 의지를 펼치기도 했다.

스승 이만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自靖) 순국하자 선생은 최후의 방법으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심하였다. 1910829일 경술국치 후 통곡하며 자결을 결심하였지만,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중지했다. 병환 중이던 부친이 1914년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치자 선생은 시를 지어 뜻을 밝혔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둔 땅이 없구나.’

선생은 영양을 떠나 영해 울티(泣峙)를 넘고 영해면 대진리 산수암(汕水巖)에 이르러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與國內同胞)과 절명시를 남기고 1914117일 상중에 쓰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향년 63세로 순국했다. 1973년 선생이 순국한 산수암에는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오백년 선말(鮮末)에 태어나 我生五百末(아생오백말)

붉은 피 전신에 어리어 赤血滿空腸(적혈만공장)

중년의 항일 19년에 中間十九載(중간십구재)

터럭은 추상처럼 변했구나 鬢髮老秋霜(빈발노추상)

국망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 國亡淚未已(국망누미이)

친상에 마음은 더욱 상한다 親沒心更傷(친몰심경상)

홀로 서 있는 옛산은 푸른데 獨立故山碧(독립고산벽)

백계에 무일방이라 百計無一方(백계무일방)

만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 萬里欲觀海(만리욕관해)

7일이 양을 회복하는 동지이니 七日當復陽(칠일당복양)

희고 흰 천 장 물결이 白白千丈水(백백천장수)

족히 내 한 몸 간직하겠구나 足吾一身藏(족오일신장)

 

사진:영양군청

벽산 김도현 선생
생가
창의순절기념비
김도현 선생이 쌓은 검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