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은 왜 망했나
지난 여름에 휴가 차 경주에 갔다가 경주 최부잣집 고택에 들러 구경했다.
최부자의 시조랄 수 있는 최국선(崔國璿)이 1631년에 태어나 1682년에 사망했으니 그 생애의 반을 따져 1660년부터라고 치면 1960년까지 약 300년간 만석 부자의 기운을 떨쳤다고 볼 수 있다.
최부잣집을 둘러보고 가장 먼저 품어본 의문은 "이 집 자손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였다.
사실 최부자의 전설이 왜 최국선부터 시작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부가 끝난 이유도 알 수 있다.
최국선의 부친 최진립은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전사했다. 이처럼 국가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변란이 생기면 국부 유지도 힘들지만 개인의 부는 그야말로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니 최부자 시대 300년간 조선에 전쟁이 없었다는 말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 300년간 큰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부자 최준에 이르러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는 국변이 일어나고,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에 휘말려들었다. 병자호란보다 더 큰 세계대전에 휘말려든 것이다.
이 정도 국가적 변란 앞에서 만석지기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일제에 아첨하여 그 부를 당분간 유지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완용 등 일가가 일제 36년간은 더없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해방 후 꼬리를 감춘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최부잣집은 <육연과 육훈>으로 후손 교육에 철저했던 터라 나라를 빼앗기자 지체없이 가지고 있던 부를 임시정부로 송금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준의 아우 최윤은 일제 하 중추원 참의로 있었는데, 최윤은 최준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세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보호하고, 이 자금이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되도록 비밀리에 도왔다.
이러한 최씨 마지막 만석꾼 최준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시정부는 조국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미군이 떨어뜨린 원자탄 두 발로 일본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조국 해방에 기여하지 못한 임시정부는 전승국 미군 세력에 밀려 건국 과정에서 소외되고, 이러면서 최준의 노력도 평가받지 못했다.
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대준 최준은 도리어 아우 최윤이 일제치하에서 벼슬했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고, 서류를 갖춰 독립자금을 대기 위한 것이었음을 해명해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이 형제는 해방된 조국에서 기껏 무죄판결을 얻었을 뿐이다.
국가에 변란이 생기면 개인의 부는 결코 유지할 수가 없다. 최준을 마지막으로 최씨일가의 10대 연속 만석꾼 부자의 신화가 끝을 맺기는 했지만, 이 가문이 세운 전설적인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불변의 교훈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이재운 선생님 > 이재운선생님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석가모니 발바닥상 108개 이미지 (0) | 2018.11.10 |
---|---|
[스크랩] 내 이름은? (0) | 2018.11.02 |
[스크랩] 갠지스강의 모래알은 대체 몇 개인가? (0) | 2018.10.24 |
[스크랩] 유명을 달리하다? 뭘 달리하는데? (0) | 2018.08.24 |
[스크랩] 교육, 과거를 가르치지 말고 미래를 가리켜라 (0) | 2018.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