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의 우리말 이야기

[스크랩] 우위를 점하다? 뭘 어쨌다고?

윤의사 2018. 7. 17. 18:51
태이자 우리말 사전 2018.7.6 - 17회 / 우위를 점하다? 뭘 어쨌다고?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말 잡학사전 / 이재운 / 노마드 / 552쪽 / 24년 28쇄


판소리를 듣다 보면 한자어에 치어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대사가 자주 들린다.
조선 사대부들이, 저희만 몰래 배운 한자 지식을 쓰면서 잘난 척하려고 일부러 우리말에 고상한 한자어를 마구 섞어 쓰다보니 그런 나쁜 말버릇이 생겼다.


- 송태조 업국지초에 황주 도화동 사는 한소경이 있는데 성은 청송 심가요 이름은 학규라 누대충효 대가로서 문명이 자자터니 가운이 영치하여 이 십에 안맹허니 금장자수에 발자취 끊어지고 겸하여 안맹허니 뉘라서 받드리오마는 그의 아네 곽씨부인 또한 현철하여 모르는 것 바이없고 백집사 가감이라 몸을 바려 품을 팔제(판소리 춘향가 시작 부분)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영어 어휘를 섞어쓰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양반 사대부가 이처럼 너덜거리는 한문책 깊숙이 박혀 있는 한자어를 꺼내 자기들끼리 암호처럼 주고 받으니 궁중은 궁중대로, 무당은 무당대로, 남사당은 남사당대로, 선비는 선비대로 다투어 은어를 만들어 썼다.
나도 어린 시절에 동네 아저씨들의 편지를 대신 써준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님 전상서'니 '옥체만강하옵시고', '가내 평안' 같은 한문투를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말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다. 그렇다면 나도 알고 남도 아는 표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대학교수가 노인회 강의를 한다면서 외래어 섞어 쓰고, 대학생에게나 쓰는 전문 어휘를 마구 떠들면 듣는 이들이 하품한다.

'우위(優位)를 점(占)하다'는 말은 사실 어설피 한문 기웃거린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 누가 봐도 우리말 어법이 아니다. 더구나 '점하다'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한자어는 두 자씩 모아서 쓰지 이처럼 한 자만 따로 떼어 쓰는 법이 거의 없다. 즉 연결하다로 쓰지 연하다, 결하다로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 '우위를 점하다'라는 말이 쓰인 것은 '우이를 잡다'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사람들이 함부로 쓰다가 생긴 말이다. 물론 '우이를 잡다'의 뜻이 뭔지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요즘에는 '우위를 점하다'가 덮어버려 그나마 쓰이지 않는다.
우이(牛耳)는 소의 귀 즉 쇠귀를 말한다. 처음부터 쇠귀를 잡는다고 표현했으면 쉽게 알아들었을 텐데 양반 사대부들이 잘낙 척하느라고 일부러 한자어를 쓴 것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제후들이 모여서 맹세를 할 때 그 모임의 맹주가 희생으로 정해진 소의 귀를 잡는다. 그런 다음 이 소의 목을 찔러 피를 내어 제후들이 돌려마시는 것은 삽혈(歃血)이라고 한다. 춘추시대에는 흔한 풍습이었다. 그 이전 상나라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고구려, 백제는 물론 조선에서도 이뤄졌다.

소의 생피를 뽑아 나눠마시는 삽혈의식에서는 쇠귀를 잡은 맹주가 중요한데, '우이를 잡다'고 하면, 여럿이 모여 하는 일에서 주동이 되거나 또는 어떤 일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우이(牛耳)의 어원을 몰라서 우위(優位)인 줄 알고 쓰는 사람들이 많다.

삽혈 의식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다. 그러니 우이를 잡다든, 쇠귀를 잡다든 알아듣는 이가 별로 없다. '시치미 떼다'보다 더 길게 살아 있던 말인데도 그렇다. 소귀내를 굳이 牛耳川으로 번역해 쓰던 양반들이 살던 나라에서 우리말의 진짜 속뜻을 찾아내기란 이처럼 힘들다.

사람의 개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주름인 지문(指紋)을 확인한다.

사람의 지능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뇌문(腦紋)인 바이오코드를 살핀다.

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그 나라 그 민족의 언어 변화를 들여다본다.


- 살아 있는 짐승의 피를 뽑아 나눠 마시는 삽혈 의식은 고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혁명, 쿠데타 모의 때 삽혈 의식을 반드시 가졌다.


* 내 소설 <왕들의 전쟁> 제2권에 제환공(제나라 제후 환공)과 노장공(노나라 제후 장공)의 삽혈 장면을 참고로 붙인다.


가 땅에 이르러 보니 제환공은 이미 흙으로 단을 쌓아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장공은 사람을 보내 먼저 사죄하고 동맹을 청했다. 제환공은 회견 날짜를 통지해왔다.

회견날이 되자 제환공은 용맹한 장수와 씩씩한 군사들을 단 아래 늘여세우고 청기, 홍기, 흑기, 백기를 동서남북 사방에 세워 바람에 펄럭이게 했다. 그리고 각기 대를 나누고 각기 장관(將官)과 통령(統領)을 두어 중손추의 지시를 받게 했다. 또한 7층 단의 층계마다 장사를 세워 황기를 잡혀 파수시키고 단 맨 위에는 대황기(大黃旗)를 세웠다. 그 대황기엔 금실로 수를 놓은 방백(方伯)이란 두 자가 뚜렷하다. 또 그 곁엔 큰북이 걸려 있다. 이 모든 것을 공자 성부가 맡아서 통솔했다.

습붕은 단 중간에 향탁(香卓)을 설치하고, 그 위에 착주반(着朱盤)과 옥우(玉盂)와 희생(犧牲)을 담을 그릇, 삽혈(歃血) 기구를 늘어놓았다. 수초는 양편에 반점(反坫)을 놓고 금준(金樽)과 옥가(玉斝)를 뒀다. 주례(周禮)에 어긋나는 게 한 치도 없다.

단 서쪽에 세운 두 석주(石柱)에는 오늘 희생으로 쓸 검은 소와 흰 말이 매여 버둥거리고 있다.

안내를 맡은 동곽아는 계하(階下)에 서고, 관이오는 상()으로서 계상(階上)에 섰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질서 정연하고 엄숙하여 빈틈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노장공이 도착하자 제군 장수가 말했다.

노후하고 신하 한 사람만 단에 오르십시오. 나머지는 단 아래서 구경하십시오.”


...조말은 대검을 놓고 습붕을 대신해서 희생의 피를 담은 쟁반을 두 제후에게 정중히 바쳤다.

두 제후는 이 피를 입술에 바르고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또한 맹세를 깨는 자를 하늘이 저주하라는 주문까지 소리쳐 외쳤다.

조말이 또 나서서 청했다.

제후들께서 아무리 화목하게 지내도 신하들이 반목하면 일이 어그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관이오는 나하고 삽혈하고 맹세합시다. 문양 땅을 돌려주겠다고 말이오.”

제환공은 그러라고 하면서 스스로 맹세했다.

관이오하고 할 필요가 없어. 내가 대신 맹세하지.”

그리고 제환공은 하늘에 높이 떠오른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벌하소서!”

조말은 희생의 피를 입에 바르고 제환공에게 재배했다. 그러고나서 두 나라 제후는 술을 나누어 마시고 동맹을 마쳤다.




출처 : 알탄하우스
글쓴이 : 태이자 이재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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