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4년부터 일본어사전을 베낀 조선어사전과 그 뒤를 잇는 우리나라 사이비 국어사전을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그래서 우리말 사전 열 권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지유신 때 홍수처럼 밀어닥친 서양의 여러 어휘를 한자어로 고쳐쓴 일본인들의 노력을 아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인들도 고뇌하여 만든 어휘이니 받아쓸 건 쓰더라도 틀린 건 바로잡자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런 고민조차 없이 중국 한자 갖다 마구 덮어쓰고, 또 일제 때는 일본어 갖다 마구 덮어썼다. 지금은 영어로 덮어쓰는 얼치기들이 널려 있다. 이게 잘못이다. 언어 생활이니 이 지경이니 30년만 묵어도 현대 한국인이 잘 읽어내질 못한다. 딱 백년 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어낼 수 있는 한국인은 아마 0.01% 수준일 것이다.
동아일보(동아도 일보도 우리말이 아니지만)에서 치매란 어휘를 바꿔쓰자는 글이 올라왔다. 미치광이 치, 어리석을 매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말이라는 주장이다.(치는 어리석다는 뜻이지 미쳤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 제기는 좋다. 의학적으로 치매는 알츠하이머로 쓰고 있으니 문제될 건 없고, 알츠하이머 이전 단계로 인지장애, 경도 인지장애 등으로 쓰이니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정신분열병도 의학적으로는 조현병으로 쓰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옛말을 쓴다. 조울병은 양극성장애, 간질은 뇌전증으로 고쳐졌다. 사실 한자를 안쓰고 우리 발음 그대로 쓰면 그냥 그대로 굳어질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점에서 그냥 치매라고 쓰고 한자 표기를 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알츠하이머란? 핵심 뇌인 해마의 신경세포가 죽거나 막혀 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장기기억 등 그 사람의 주체 정보가 사라져 장기기억이 조금씩 사라지는 병. 진행 결과에 따라 자기가 누군지, 가족이 누군지 모른다. 공간과 시간 개념도 잃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질병이다.
대뇌 혈관이 막혀 생기는 인지장애와는 달리 구분한다.
중앙일보 / ‘치매’, 이 표현 꼭 써야 할까요?
도쿄에서 기사를 쓰다 보면 일본식 표현을 쓴다는 핀잔을 자주 듣곤 했다. 가령 요즘은 문제없이 사용되는 단어 ‘입장(立場)’은 10년 전만 해도 ‘자세’ ‘처지’ ‘주장’ 등으로 바꾸라는 주문을 받았다. ‘존재감’도 기계적으로 ‘영향력’으로 바뀌었다. 영어로 ‘presence’인 존재감은 영향력과는 어감이 다르지만 상관없었다.
그때마다 조금 억울했던 게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한국어로 알고 사용하는 서구어 대부분이 일제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번역어를 통해 근현대 개념을 수용했다는 점도 일본에 빚지고 있다.
메이지유신(1868년)을 전후해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번역 붐이 일었다. 서구 문물을 접한 일본인들이 네덜란드어 독일어 영어를 어떤 한자어로 옮길 것인가를 놓고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는 ‘speech’를 처음에는 ‘演舌’로 번역했다가 어감이 나쁘다 하여 ‘演說’로 바꿨다. ‘會社’란 말이 상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뜻하게 된 것은 1866년 후쿠자와의 저서 ‘서양사정’부터다. ‘society’는 처음에는 ‘교제(交際)’ ‘세상(世間)’ 등으로 번역되다가 1875년 도쿄니치니치신문에 ‘社會(소사이어티)’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심지어 중국의 정식 국가명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순수한 중국 유래 한자는 중화(中華)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인민’도 ‘공화국’도 영어 개념을 번역해 한자어를 만든 것은 일본인이고 그것이 중국에 역수입됐다.
그런데 ‘치매’라는 일제 단어는 늘 저항감이 느껴진다. 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이 단어를 기피하기 위해 애쓰곤 했다. 주로 ‘알츠하이머’를 썼지만 글자 수를 너무 잡아먹는다. 최근엔 ‘인지증(認知症)’이라 쓰되 처음에만 괄호를 붙여 ‘치매’라고 설명해주는 일이 많아졌다.
치매의 한자는 미치광이 치(癡), 어리석을 매(태·‘태’라고도 읽는다)로 구성된다. 글자 그대로라면 ‘어리석은 미치광이’란 뜻이다. 메이지 초기 의학용어집에서는 라틴어 ‘Dementia(정신이 없어진 사람)’를 ‘광(狂)의 일종’이라고 번역했다. 그 뒤 치광(痴狂), 풍전(풍癲), 치매 등으로 번역되다가 1900년대 초반 유명 의학자가 ‘狂’이란 글자를 피한다는 취지로 ‘치매’로 쓰기로 했다. 한반도에도 그 단어가 들어간 것이다. 아마도 항간에서 쓰이는 ‘노망(망령)’보다는 의학용어 냄새가 난다고 봤을 것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치매가 차별적 표현이라 하여 2004년 후생성이 나서 ‘인지증’으로 싹 바꿨다. 고령이나 혈관 장애, 알코올, 파킨슨병 등으로 인지 기능에 장애가 생기는 증세를 통틀어 말한다. 한국에서 환자의 인권을 존중해 정신분열병을 조현병, 간질을 뇌전증으로 바꿔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장수대국 일본은 당연히 인지증 환자도 많다. 인지증은 안락사를 주장하는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 등 고령자들이 가장 겁내는 증세이기도 하다. 자신이 자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몸만 살아 망신스러운 일을 벌일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인지증 환자와 그 가족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진단 뒤에도 자의식이 있고 논리정연한 사람이 적지 않다. 완치는 어려워도 약물과 주변의 도움으로 진행 속도를 늦추고 증세를 완화하는 길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국에서 ‘치매 안심센터’를 만든다거나 ‘치매 국가책임제’를 시행한다는 등의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취지가 반가우면서도 신경이 거슬린다. 치매 대신 다른 표현을 쓰면 안 될까.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를 청각장애인, 말을 못 하는 사람을 언어장애인으로 바꾼 걸 감안하면 ‘인지장애’ 정도가 어떨까. 장수화가 진행될수록 이 단어를 쓸 일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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