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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주 충의사(忠懿祠)

윤의사 2015. 1. 6. 10:03

 

충의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충의사 안내문

 

 

외삼문인 충의문(忠義門)

 

 

들어갈곳이 없어서 담밖에서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다행히도 좌측으로 돌아가니 충의사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협문을 들어서니 가호서원 옆모습이 보이고

 

 

중문으로  들어가니  사우, 충의공의 일대기와 유물을 전시한 전시관,

농포집책판(農圃集冊板)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강당(講堂) 등의 건물이 있다.

원래는 귀곡동에 있던 것을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하여 1997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였다 한다.

 

 

복관대첩비(北關大捷) 연혁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승진비이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의 업적은 선생을 모함한 무리에 의해

가려지고 오히려 선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지 85년 뒤인

  1708년에는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쓰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고을 주민의 뜻을 모아 마침내 북관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북관대첩비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러. 일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이 비석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 기록임을 알게 되자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그후 비석은 일본 왕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실은 도쿄(東京)에서 활동하던 최서면(崔書勉) 선생이 1978년 옛 기록을

 검토하다가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이 대한흥학보에

 기고한 글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이 비석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 후 한국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수차례 비의 반환에 노력을 기울여 2005년 10월 20일에

 비를 반환받게 되었다. 이비석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남. 북간의 잃어버린 역사성을 회복하고 한. 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증거라고 하겠다.

 

 

북관대첩비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본래의 자리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복원되었으며, 이 비석은 경상남도와 진주시가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2012년 11월 23일 충의사에 세운 복제비이다.

이 비문의 한글번역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선생이 했다고 한다.

 

 

농포 정문부 선생 사적비

 

 

농포 정문부 선생 사적비 뒷면

 

 

장판각(藏板閣)

 

 장판각에는 농포 정문부 선생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농포집(農圃集)은 6권 4책. 목판본. 초간본은 1758년(영조 34) 현손 상점(相點)이

간행했으며, 1890년(고종 27) 9대손인 혁교(奕敎)가 중간하였다.

초간본은 1권만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중간본과 배열이 약간 다르다.

권두에 민우수(閔遇洙)의 서문과 김익용(金익容)의 중간서가 있고

 권말에 상점. 혁교. 송병선(宋秉瑄)의 발이 있다.

내용은 시(詩). 부(賦). 전문(箋文). 여문(儷文). 장계(狀啓) 및 부록 등이 실려 있다.

시는 주로 북로(北路)의 풍치를 노래한 것이고, 문은 당시의 정세를 아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내삼문인 탱천문(撑天門)

 

이곳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명장(名將)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浮, 1565~1624)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이다.

충의공 정문부의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선조 21년(158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가 임진왜란 때 북평사(北評事)로 의병대장에 추대(推戴)되어

함경도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고 지방반군을 소탕하고 북방호족을 몰아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을 이루었다.

전쟁 후 여러벼슬을 거쳤으나 인조 2년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읊은 시로 인해  이괄의 난에 연루(連累)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무죄가 해명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충의(忠懿)의 시호가 내려졌다.

북한에는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회령의 현충사(顯忠祠), 부령의 청암사(靑巖祠),

  남한에는 진주 충의사와 의정부 충덕사(忠德祠)에 제향되어 있다.

 

 

 충의사(忠毅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 구조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사우 내부에는 장군의 유품으로 의복 1점, 교지(敎旨) 수십통,

환도(環刀) 1점, 전적(典籍) 등이 보존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에는 농포 정문부 선생의 공적을 유물, 그림, 도표, 모형, 영상으로 전시하고,

관복과 장검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어 이곳에는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 의해 탈취되어 반환된 북관대첩비의 탁본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에서 종택이 보여서 중문을 나가 그곳으로 가보았다.

 

 

 

 

 

 

종택 뒤 부조전(부조묘)

 

 

가호서원(佳湖書院)

 

가호서원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여러개의 현판들이 걸려 있다.

 

 

진주 까꼬실(귀곡)에는  부조묘 사당만 있었는데 1970년 가호서원을 세우면서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충의사" 라는 편액을 받았다.

부조묘는 나라에 공훈(功勳)이 있는 분의 신위(神位)를

옮기지 않고  왕의 허락을 받아 신주(神主)를  모시는 사당이다

 

 

진주에 농포 정문부를 모신 사당이 있는 이유와  용암리에 해주정씨가

정착하기까지는 농포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남쪽 지방인 진주에 가서 살라고 유언하였다 전한다.

 

 

담밖에 세워진 사적비

 

 

사적비에서 바라본 풍경

 

 

사적비 맞은편 원불교 용암교당 앞에  수고 15m, 나무둘레 50m,

수령 400여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 있다.

 

 

충의사 옆에 있는 재실  삼덕재(三德齎)

 

삼덕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1997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충의공 정문부 장군이 시화로 억울하게 옥사를 하자 1625년 상복을 입은채

 진주로 이거하여 일문을 번성하게 한 정문부 장군의 아우 용강 문익(文益, 1568~1639)과

 두 아들 집의 대영(大榮, 1586~1658), 승지 대륜(大隆, 1599~1661)의 삼숙질(三叔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음력 4월 13일 제향하고 있다고 한다.

 

 

삼덕재에서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니 삼효각이 세워져 있다.

 

삼효각은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후손으로 삼대가 정려를 받음으로서

해주정씨 가문을 명문가로 드높인 15세 역효당 육(亦孝堂 堉, 1718~1769),

16세 만성재 현의(晩省齋 鉉毅, 1734~1813),

17세 관란 달현(觀瀾 達賢, 1778~1849)의  정려각이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
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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