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은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말한다.
하회마을은 대표적인 전통마을로 1984년 국가중요민속자료(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려 초기에 형성된 하회마을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고려말 조선초 이후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오며 오랜세월 잘 보존된 마을이다.
풍산류씨 입향에 관해서는 풍산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화산에 여러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立巖古宅), 보물 제306호)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柳從惠)가 하회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이기에 유서가 깊다.
우뚝 솟은 대문을 세운 고려 건축양식인 사랑채와 조선 건축양식인 안채가 어울리는
독특한 건물로 15세기 무렵에 지은 후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기도 하였고,
여러대에 걸쳐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입암고택이란 현판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온다.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가진다.
양진당이라는 이 집은 풍산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 '입암고택(立巖古宅)'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1515~1573)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서쪽,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길을 따라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남향이라 하회마을에서는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집이라고 한다.
안에서 바라본 대문간 행랑채의 모습
담장 너머로 바라본 안채의 바깥 모습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ㅁ'자 형의 안채와
북쪽의 사랑채를 '-'자 형으로 배치하였다.
오른쪽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공신이나 대학자 등에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충효당은 양진당 앞 길 건너편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밖에서 바라보는 행랑채(대문간채)는 모두 12칸으로 길게 늘어서서 안채와 사랑채를
가리고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 8칸, 오른쪽 3칸으로 되어 있다.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고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52칸 규모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충효당 건물이 바로 나온다.
기단을 높이 쌓지 않은 누마루는 기단이 낮아 편안하게 보인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있는 '충효당(忠孝堂)' 이라고 쓴 편액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써준 글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왼쪽 2칸은 온돌이고,
가운데 2칸은 트인 마루이며, 나머지 오른쪽 두칸은 판벽을 쳤다.
계자난간을 두른 가운데 정면으로 출입구가 나 있다.
마루 저편은 훤히 뚫려 있어 뒤뜰이 바라다 보이는 개방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ㅁ'자 모양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꺽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붙어있는데 방이나 마루로 연결되지 않아 신을 신고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사랑채 뒷쪽의 모습
이 쪽문으로 나가니 화장실이 있다.
영모각 맞은편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삼문으로 되어 있다.
사당 앞에는 오래된 반송이 서 있고 반송 앞에는 영모각이 자리하고 있다.
하회마을 충효당 내 영모각(유물전시관) 전경
충효당 영모각(永慕閣)
영모각은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유물을 보관.전시 하는 곳으로 류성룡종손가문적(보물 제160호)와
류성룡종손가유물( 보물 제460호) 및 서애 선생 필첩, 영의정임명교지, 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선조친필 밀부유서(密符諭書), 광국공신교서 등 각종 유물과 문서가 보관되고 있다.
'영모각(永慕閣)'이라 쓰여진 현판은 개관식 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써서 보낸 것이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현에서 아버지 유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익혔으며,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1575년 직제학,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부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전에 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으로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게 서울을 수복하고 그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다시 영의정이 되어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1598년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07년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뜨니 향년 66세였다. 류성용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동안 조회를 전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을 하도록 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영모각에서 바라본 반송
줄기 밑부분에서 많은 줄기가 갈라져 우산모양으로 자라는 것을 반송이라 한다.
꽃은 5월에 피는데 암꽃이 수꽃보다 약간 작다. 수꽃은 1cm 크기의 타원형이며
황색을 띠고 아꽃은 6mm의 달걀형이 자주색을 띤다.
열매는 구과로 길이 4.5cm의 달걀모양이며 9~10월에 황갈색으로 익는다.
내건성식물로 물이 잘빠지는 사질토양에서 잘 자란다.
행랑채 안쪽의 모습
대문에서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안동을 방문하여 심은 구상나무가 마주 보인다.
충효당 대문을 나가면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구상나무이다.
하회마을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과 충효당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전통가옥들을 둘러보니 아늑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로 나가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방문기념 전시관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들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안동방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과 부군 필립공이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9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하였다.
이는 1883년 조(朝).영(英) 우호체결 후 영국국가원수로서는 처음 방문이다.
방문기간인 21일에는 가장 한국적이고 전통이 살아 숨쉬며
그 정취가 남아있는 선비의 고장인 안동을 찾았다.
여왕은 하회마을의 충효당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모습을 보았으며,
담연재에서는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생일상을 받고는 고마워 하였다.
그리고 안동농산물도매시장에 들러 경매과정을 보고 농민들과 친근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으며, 봉정사에서는 전통사찰의 건축물을 관람하고, 타종하는 모습과
북치는 광경을 보았으며, 또한 돌탑쌓기도 하였다.
여왕은 안동방문 동안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궁금하고 신기한 것에는 질문을 하는 등
대단한 관심을 보여 주었으며, 방문을 마친 후 「안동은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한 전통과 문화를 겸비한 미래의 도시」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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