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안성유기의 번창2

윤의사 2009. 11. 8. 11:58

2. 대동법 실시의 영향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유기는 청동기 시대 이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주로 지배층이 권위와 힘의 상징으로 칼 등의 무기가 주로 제조되었다. 그러나 철기가 전래되면서 무기나 제기에 쓰이던 청동기는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주로 불상이나 범종, 반자 등 불교 유물로 많이 사용되었다. 청동이 그릇으로 사용되던 시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때 유기를 사용하는 계층은 주로 지배층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유기는 대개 수원과 광주, 양주에 유기장이 있었다. 안성에는 없었던 것이다. 안성에 유기장이 등장한 것은 바로 대동법이 실시될 무렵인 1600년대 초반이다. 바로 대동법이 실시된 시기(1608년)와 일치한다. 바로 유기장들이 대동법의 실시로 관영수공업이 쇠퇴하면서 각기 살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유기를 공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하고 난 뒤, 나머지 유기들은 자유롭게 판매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유기장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삼을만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골랐다. 유기장들은 서울에서 가까워 궁궐에 납품이 유리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아궁궐로 납품하고 남은 유기를 팔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건에 맞는 장소가 바로 안성이다. 안성은 기흥이나 병점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목이면서 삼남(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었으며, 진천이나 천안과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유기를 비롯한 안성의 명품들로 인하여 안성장은 경기의 송파장, 은진 강경장, 전주 읍내장, 함경도 덕원 원산장 등과 함께 큰 시장의 하나라고 1808년에 쓰여진 <만기요람>에 나타나 있다. 유기장들이 안성에 자리잡은 세 번째 이유는 바로 방자유기와 관련되어 있다. 방자유기를 만드는 안성 유기장에게는 갯토가 필요했다. 안성에서 가까운 평택은 황해 바다를 접하고 있어 필요한 갯토를 마음대로 얻을 수가 있는 이점이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의 성장을 가져왔다. 대동법 실시 초기의 공인들은 궁궐에 납품하는 유기만 취급하다가, 점차 양반세도가들에게 주문을 받아 판매를 시작하였다. 공인들은 유기를 생산하는 납청, 구례, 진주, 재령, 운천 등의 장소 중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성에 자리잡은 유기장들에게 주문을 하였으므로 안성 유기는 더욱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장조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 순조왕후인 순헌왕후의 장레식에 각각 안성유기장을 징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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