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국인의 공간 의식으로 파고든 중국 지명들
최초의 언어는 아마도 특정 공간을 나타내는 용도로 많이 쓰였을 것 같다. 수렵이든 어로든 목축이든 농경 이전의 인류 문화는 주로 집 밖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러자면 공간을 인식하는 어휘가 잘 발달돼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공간 어휘는 삼국시대 이전만 해도 그리 다양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우리말에서 방위나 공간을 가리키는 어휘가 비교적 드문 것은 이를 보여준다. 물론 지금은 순우리말 공간 어휘가 한자어에 치여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지만, 그리 풍부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공간 의식이 확대된 것은 그래도 한자어 덕분이다. 진(秦)나라 이후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공간 어휘를 받아들였다. 동서남북을 해 하늬 마 높 정도로 쓰던 수준이었으므로 중국의 8방, 12방, 24방, 28방 등은 매우 구체적인 공간 어휘였다. 비록 한자어이지만 이런 어휘를 놓고 굳이 외국어니 사대주의 문화니 하고 흘겨볼 필요는 없다. 도리어 우리 민족의 공간 의식을 넓힌 공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불교가 유입되면서 극락, 서천, 지옥, 염라국, 도솔천, 도리천, 삼천대천세계 같은 상상의 공간 어휘가 들어왔다. 이와 함께 낙양, 장안, 여산, 강남, 북망산, 태산, 여산, 무릉도원, 등용문, 불야성, 삼신산과 같은 중국 지명이 우리의 공간 어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공간 어휘에 붕새, 기린, 난조, 짐새, 현무, 백호, 주작, 청룡, 서왕묘, 무녀, 맥, 낭패, 귀신, 또 산해경의 희한한 동물 등 상상 어휘까지 대거 들어오면서 우리 문화 소재가 풍부해졌다. 이처럼 처음에는 단순히 공간 어휘나 상상 어휘로 들어오던 한자어가 점차 우리 의식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조금씩 변질되기도 했다. 중국에 대해 우리나라를 가리켜 극동(極東), 동국(東國), 동방(東邦), 동이(東夷), 방국(邦國), 청구(靑丘), 해동(海東), 향(鄕)이라고 부르는 거야 겸손이나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지만,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중국의 시가 신라로 오면 향가가 되고, 중국 가사(歌辭)가 조선에 오면 별곡(別曲)이 되고, 중국에서는 약인데 우린 향약이고, 중국에선 음악인데 우린 향악이고, 중국에선 역사인데 우린 동사(東史)가 된다. 멀쩡한 우리 산도 송악산은 만수산, 지리산은 방장산, 백두산은 장백산, 금강산은 봉래산, 한라산은 영주산이 된다. 중국에 있는 명산으로 별칭을 삼아야 그럴듯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소문이 난다 싶으면 장안에 나고, 책이 좀 팔리면 낙양의 종잇값이 올라가고, 좀 괜찮은 집이면 아방궁이고, 높다 싶으면 태산이요, 죽으면 북망산 가고, 출세하려면 등용문을 올라야 하고, 잘 안 되면 백년하청이고, 가고 싶은 이상향은 무릉도원이고, 달나라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계수나무가 자라고, 우리나라 제비들까지 강남으로 가야만 하고, 두견새는 울면서 귀촉도(촉나라로 들어가는 위험한 협곡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자 주희의 무이구곡도가 있으면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도가 생기는 등 중국의 공간 어휘는 항상 조선 선비들의 머릿속에 불균형 내지 비대칭으로 살아 있었다. 심지어 가보지도 못한 중국 남방의 산수를 즐겨 좀 솜씨가 있다 싶은 화가라면 조선 산수는 버려두고 계림 소주의 산수를 그리느라고 바빴다. 하지만 대량 유입된 중국 공간 어휘는 우리 선조들의 공간 개념을 깊고 넓게 확대시킨 긍정 효과도 크다.
이재운/<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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