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배 타고 들어와 우리말로 귀화한 외국어들 ①
옛날에 말이 들어올 때는 말을 타거나 배를 탔을 것이다. 역관, 사신들의 교통수단이 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신라·백제 때는 중국·일본 왕조와 통하려고 주로 배를 타고, 고구려는 말을 탔을 것이다. 김수로왕 부인 허황옥은 중국 남부나 인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올 때 인도어를 가져오고, 신라의 처용이나 고려·조선시대 아랍인들 역시 배를 타고 올 때 이 지역의 언어를 가지고 들어왔다. 배로 들어온 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쌀일 것이다. 쌀이 처음 재배된 곳은 인도 동북부의 ‘아삼’에서 중국 윈난(운남) 지방에 걸친 지대라고 한다. 중국의 쌀, 벼, 나락 등의 어휘는 배를 타고 들어와 경기도 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남부보다 중부지방에서 벼농사가 더 먼저 시작되고, 이런 역사와 전통에 힘입어 경기미라는 명성이 생긴 것이다. 탄화미 발굴 조사 결과 경기도 여주 흔암리는 약 3000년~2500년 전, 경기도 고양 일산은 4340년 전, 경기도 김포 통진은 약 4000~3000년 전, 평안남도 평양의 대동강가는 약 3000~2500년 전, 충청남도 부여는 약 2600년 전, 전라북도 부안은 약 2200년 전,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가 약 19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우리나라 벼농사는 한강이나 대동강 유역에서 시작돼 한반도 남부로 전파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고조선 후기에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수경 재배의 어려움 때문에 백제 초기에 본격 재배되기 시작한 듯하다. ‘벼’란 어휘는 인도어 ‘브리히’에서 왔으며, 같은 인도어 ‘니바라’가 나락의 어원이라고 한다. 또 쌀은 고대 인도어 ‘사리’, 퉁구스어 ‘시라’가 변한 말로 추정한다. 충청도를 경계로 그 이북에서는 벼라고 부르며, 그 이남에서는 나락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나락과 벼는 들어온 경로와 시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배 타고 들어온 말 중 역사가 깊은 어휘로 차(茶)가 있다.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와 해상 교역이 쉽던 광둥(광동)성은 차를 ‘차’(cha)라고 하고, 육로로 중국 북방과 연결되기 쉬우면서 한때 영국인들이 자리잡은 푸젠(복건)성은 ‘다’(tay)라고 했다. 그러니 차는 배 타고 들어오고, 다는 주로 말을 타고 들어온 듯하다. 그래서 한자 茶 발음이 북방 정권인 당나라 때까지는 ‘다’가 되고 황하 이남으로 천도한 송나라 때부터는 ‘차’로 변한다. 우리가 茶를 ‘다’로 읽는 것은 한자어가 주로 당나라 때인 후기 신라 때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로 우리나라 남쪽에는 차 문화가 일찍 발달하고, 일본에도 차 문화가 발달했다. 일본어, 포르투갈어, 힌두어(허황옥이 가져온 것도 ‘차’다), 페르시아어, 터키어, 러시아어가 이 계통에 속한다. 한편 영국 덕분에 푸젠성 발음으로 퍼져나간 ‘다’는 말레이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노르웨이어 등에 뿌리를 내렸다. 茶를 다로 읽는 것은 육로로 들어올 수 있는 우리나라 북방 문화 탓이며, 이 때문에 한자 표기에서 주로 다로 읽는다. 이와는 달리 우리말로 발음할 때는 차라고 하는데 배 타고 들어온 중국 광둥성 말이거나 인도어이기 때문이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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