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칭기즈칸, 몽골어를 고려 왕실에 보내다 ②
중세 영국 궁정에서는 궁중어로 프랑스어를 썼다. 궁중이란 일반 백성들이 사는 여염하고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고 여겨 이처럼 언어를 구분했다. 연구 결과, 백제 궁중어는 고구려어와 같았으나 일반 백성들은 궁중어와 달리 마한·변한 지역의 언어를 썼다고 한다.
고려시대 궁중어에는 몽골족 왕비들의 영향으로 몽골어가 대거 들어왔다. 이들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한 고려 국왕들도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 풍습을 따르고, 아울러 몽골어를 구사했다.
충선왕 같은 경우는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국제정치를 하면서 차기 황제를 옹립하기도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공민왕도 왕이 되기 전에는 대도에 가 원나라 황제의 숙위를 지냈으니 몽골어 정도는 자연스럽게 구사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우리말 속에 침투한 몽골어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가늠하기도 어렵다.
조선 영조 이금(李昑)이 무수리가 낳은 자식이라 하여, 이때부터 무수리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는데, 무수리란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낮은 직급의 궁녀를 말한다. 무수리가 몽골어로 ‘소녀’라는 뜻이거나, 열악한 지위에 있다는 ‘마고소리’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청(三廳: 禁軍三廳으로 내금위·겸사복·우림위를 가리킴)의 하인을 가리켜 ‘조라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마부를 가리키는 몽골어다. 몽골에서는 오늘날에도 운전기사를 조라치라고 부른다. 이처럼 치가 들어가는 말로는 홀치(왕을 지키는 위사), 반빗아치(반빗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이)가 있다.
고려조 궁중에는 응방(鷹坊)을 두어 국왕들이 매사냥을 즐겼다. 송골매나 보라매 등 매를 사냥하는 사람이란 뜻의 ‘수알치’(수할치), 주인의 주소를 적어 매 꼬리에 다는 ‘시치미’ 등이 다 몽골어다.
또 조랑말 같은 경우 그간 어원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 역시 동몽골산 말인 조리모리에서 왔으며, 어원을 따질 때 거의 노출되지 않던 ‘사돈’이란 어휘도 일가친척을 뜻하는 몽골어와 여진어에서 온 것이 밝혀졌다.
족두리는 원래 새의 깃털이나 낙타 목 부분의 긴 털을 가리키는 말이고,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이성계의 이름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의 ‘아기’는 황제나 귀족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갓난애’란 뜻의 높임말이고, 흔히 아가라고 하는 말은 여성, 특히 처녀에 대한 경어로 쓰이던 몽골어다.
이런 몽골어는 대부분 고려 왕실로 시집온 원나라 공주와 그 일행들이 궁중어로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궁중어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흘러나와 마치 우리 고유어인 듯이 굳어진 것이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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