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호(胡) 자 표지 달고 사막을 건너온 중앙아시아어 ①
우리말에는 뜻밖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말이 아주 많다. 특정 지역의 어휘가 많이 들어왔다는 것은 왕래가 자주 있으며, 문화와 문명이 많이 다르다는 걸 뜻한다. 예를 들어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에 어휘를 주고받는 현상이 일어난 시기는 크게 두 번이었다. 먼저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와 이후 삼국시대까지 열도에 정치집단이 생기는 과정에서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대거 열도로 들어간 것이다. 또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신문명의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지배자로 나타나고, 조선인들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어휘 역전 현상이다. 우리말에 특정 지역 어휘가 많이 보이면 그 이면에는 역사적 접점이 반드시 있었거나 있다는 의미다. 우리말에서 중국 한자어(보통화 이전의), 일본어, 미국어(영국 영어가 아닌) 어휘가 많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이 세 나라와의 역사적 교류가 깊었거나 깊다는 의미다. 그런데 놓치기 쉬운 게 중앙아시아 어휘다. 중앙아시아 어휘라고 부른 것은 우리말에 무슨 상표처럼 붙어 다니는 ‘호(胡)’ 자 돌림 어휘들 때문에 크게 묶은 말일 뿐 학술적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 심지어 고조선과 고구려를 호(胡)로 지칭한 중국 문헌도 있기 때문이다. 호 자 돌림 어휘는 생활 어휘로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수량이 많은 만큼 원산지가 제각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오랑캐로만 번역하는데 우리말 ‘오랑캐’는 모호한 면이 너무 많다. 마치 파란색과 푸른색을 잘 구분하지 않고 아무 데나 쓰는 것처럼 호(胡) 역시 너무 폭넓게 쓰고 있다. 원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호(胡)는 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이 호국이 망하면서 호는 서쪽의 티베트족과 북쪽의 몽골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때부터 한(漢)이 멸망할 때까지 ‘胡’가 붙은 말은 대개 티베트계와 몽골계 유목민들을 가리켰다. 그러다 흉노·갈·선비·저·강 등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왕조를 세우면서 호(胡)는 중국을 뺀 외국, 특히 유목민족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로 변했다. 수와 당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국이나 페르시아를 호국이라 했다. ‘소그드’는 우즈베키스탄과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지방을 가리킨다. 호복(胡服), 호모(胡帽), 호선무(胡旋舞), 호희(胡姬)란 말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때의 호는 소그드를 말한다. 따라서 전국시대와 한(漢)대의 호는 티베트계와 몽골계 유목민을 가리키고, 당 시기의 호는 소그드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그드가 무역으로 한창 위세를 떨칠 때를 빼고는 천축, 서역으로 불린 인도가 호(胡)에 포함됐다. 이후 몽골제국 원(元) 시절, 호(胡)는 이 제국만큼이나 매우 포괄적인 용어로 쓰였다.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에 이르는 광범위한 서역 일대,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호라는 말 속에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호가 원래 몽골을 가리키는 어휘였으므로 몽골 지배 아래서는 이 어휘 사용이 제한돼 이때 들어온 중앙아시아 어휘에는 호 자 표지가 잘 붙지 않는다. 즉, 수박·목화·무명 같은 경우가 여기 속하는데, 다른 중국 왕조라면 반드시 호 자를 붙였을 테지만 이때는 그렇지 않다. 이 영향은 명 왕조까지 계속돼 호는 중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유목민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 되었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이재운 선생님 > 이재운선생의 우리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으로 건너갔다 천년 만에 돌아온 우리말 (0) | 2009.03.16 |
---|---|
13. 호(胡)자 표지 달고 사막을 건너온 중앙아시아어 ② (0) | 2009.03.09 |
11. 한국인의 공간 의식으로 파고든 중국 지명들 (0) | 2009.02.24 |
10. 배 타고 들어와 우리말로 귀화한 외국어들 ② (0) | 2009.02.18 |
배 타고 들어와 우리말로 귀화한 외국어들 ① (0) | 2009.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