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52

안동의 파락호, 김용환선생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가리키는 말이 '파락호(破落戶)'라고 말한다. 안동에서 파락호의 대명사로 불려지는 사람이 바로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선생이다. 김용환선생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다. 김용환선생은 안동지역의 노름판을 쥐고 흔든 사람이었다. 저녁 무렵에 시작한 노름이 새벽에야 끝나는데, 막판에는 판돈을 모두 걸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지면 "새벽 몽둥이야!" 라고 김용환선생이 소리치면서 수하의 사람들이 판돈을 덮쳐 자루에 담아 유유히 사라지곤 하였다. 이렇게 노름으로 김용환선생이 종가 재산으로 전해진 논밭 18만평(오늘날 가치 400억원)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선생이 만주에 독립군 자금을 댄 독립투사임이 死後에 ..

동작구 흑석의 심훈

일제 강점기 소설가로, 시인으로, 영화인으로 활동한 심훈. 동작구 흑석성당에 심훈의 생가터와 좌상이 있다. 흑석동에서 태어난 심훈은 아명으로 삼보(三保), 또는 삼준(三俊)으로 불리웠다. 1917년 조선 왕족인 이혜영과 혼인하였으며, 3.1운동에 참여하여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1927년 일본으로 가서 영화 공부를 하고, '먼동이 틀 때'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 주관한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할 때 장편소설 '상록수'를 집필해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저항 의식과 예언자적 지성, 민중적 생명력을 문학으로 나타냈다. 대표작으로 , , 와 시 '그날이 오면" 등을 남겼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C...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정의공주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번지에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의 무덤이 있다. 정의공주 묘역, 위의 오른쪽이 정의공주묘이다(출처:진성규교수님) 정의공주는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 세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에서 정의공주의 공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이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사투리를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왕자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가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족보이므로 정의공주에 대해 과장했을 수도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관계가 있으므로 기록이 남겨졌을 것이다. 관찰사를 역임한 안망지의 아들 ..

의령출신 독립지사 안희제선생

안희제선생은 1885년 음력 8월 4일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인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글쓰기에 뛰어났다. 뛰어난 글쓰기는 17세 때 의령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가장 먼저 시를 써서 제출하였다. 이를 본 의령군수가 칭찬을 하고 후한 상을 주었다. 이때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조욕유한심벽곡(鳥欲有閑尋僻谷) 일렴편조도중천(日慊偏照到中天)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골짜기만 찾아드는데 해는 편벽되기를 싫어하여 중천에서 광채를 더한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양정의숙을 졸업하였다. 1916년 의령에 있는 논밭 2천마지기(1마지기는 2백평)를 팔아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을 파는 백산상회를 세웠다. 191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각지..

바로 보아야 할 이인직

이인직이라고 하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 를 지은 사람으로ㅡ 알고 있다. 그런데 이인직이 친일파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인직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였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윤옥 시인의 시집 에 소개되고 있다. 이완용에게 일본과의 병합에 대해 종용했다고 한다. 즉, "최근 저는 이수상(이완용)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삼가 아뢰었습니다. 2천 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 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이 취할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일본과의 병합에 굉장히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원각사를 세운 것도 친일 매국노인 송병준과 함께 세웠다고 하니 신빙..

양구 박수근화가

대한민국 서양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인 소재를 소박하고 서민적인 분위기로 잘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박수근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매일 산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봄이 오다"가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1953년 대한민국 미술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다. 그 뒤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의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수근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 공간감을 무시한 채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운 듯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지는데, 대표작으로는 '절구질하..

이벽과 절명시(絶命詩)

이벽은 본관이 경주이고, 본명은 덕조(德祚)이다. 성호 이익은 이벽에게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지하기도 하였다. 정조 1년(1777)에 권철신과 정약전 등과 천주교에 관한 토론회를 가진 후에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이승훈에게 '요한'이라고 영세를 받고 남인들 사이에서 선교에 힘썼다. 정약용의 스승이기도 한 이벽은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매제이다. 정조 9년(1785)에 김범우의 체포로 서학이 탄압을 받게되는 을사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이벽의 아버지인 이부만이 결사 반대를 하자 단식 끝에 15일 만에 순교하였다. 숨지기 직전 절명시를 남겼다. 무협중봉지세사입중천(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은하열숙지년금천천국(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 무협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형세로구나/ 이제 죽어서..

전라남도 나주 나대용장군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가면 나대용장군을 만날 수 있다. 나대용 장군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36세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했으며, 발포만호의 임시지휘관을 맡기도 했었다. 나대용 장군은 조선 기술뿐만 아니라 전술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옥포해전에서 왜군 전선 두 척을 부쉈으며, 사천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도 분전했던 용장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창선이라는 특수한 배를 만들었으며, 해추라는 일종의 쾌속선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사진제공:한림촌부의 행방기

영주 금성단

금성대군은 세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한 후에 그는 수양대군 등과 함께 단종 앞에 나아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금성대군도 안평대군처럼 수양대군과 평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홉 살이나 위인 수양대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금성대군은 형식적인 말로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1453년 염려한 대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자 더욱 단종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러한 금성대군의 심정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삭녕으로 유배보내고 말았다. 이때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독촉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1455년이었다. 1456년 사육신 ..

동학 2대교주 최시형

동학의 제2대 교주 심한 탄압 속에서도 열심히 포교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법적으로 동학을 인정받기 위해 온건하게 투쟁하였으나,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교조 신원 운동과 갑오 농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릴 대 이름은 경상,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다. 최시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어렵게 자랐다. 하지만 의리가 있어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경주에 살 때는 마을 대표인 집강으로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는 생활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서른 살이 넘어 최제우를 만났다. 그 후 매달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도를 닦으며 동학의 진리를 깨우쳐 나갔다. 그런 다음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학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