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영주 금성단

윤의사 2021. 1. 1. 17:21

금성대군은 세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한 후에 그는 수양대군 등과 함께

단종 앞에 나아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금성대군도 안평대군처럼 수양대군과 평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홉 살이나 위인 수양대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금성대군은

형식적인 말로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1453년 염려한 대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자

더욱  단종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러한 금성대군의 심정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삭녕으로 유배보내고 말았다.

이때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독촉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1455년이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갈 때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는 여기서 본격적인 모의를 하기 시작했다.

금성대군은 부사 이보흠을 중심으로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를 결집시키고

경상도 안에 있는 지방 양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있기 직전 관노의 고발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금성대군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거사 목적은 오직 단종 복위에 있었다. 맏형인 문종이 살아있을 때 금성대군은 조카의 신변 안전에 대해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맏형의 유언을 받들어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다.

아무런 뜻을 품지 않고 있었다면 왕이 된 수양대군의 혜택을 받아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의 쿠테타를 반역이라고 판단,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아 거사를 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금성대군은 정조 때에 와서야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정식으로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가 유배되었던 순흥은 오늘날 영주이다. 

소수서원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숙종 45년(1719)에 부사 이병하가 설치하였다.

영조 18년(1742)에 경상감사인 심성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금성단으로 들어가는 입구
금성단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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