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이승훈

윤의사 2020. 6. 15. 15:53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한국 천주교회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아버지 이동욱은 남인 출신이며 참판을 지냈다.

외할아버지인 이용휴와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으로

기호남인 중 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기경 등과 학문의 맥을 함께 했다.

성호좌파의 학맥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영향으로

서양의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영조 51(1775)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고,

정조 4(1780)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에 힘썼다.

정조 7(1783)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친척 이벽의 부탁을 받고 천주교 서적을 구하러

베이징 북천주당에 찾아갔다가 천주교 책과 교리를 보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정조 8(1784)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 되었다.

17843월 천주교 서적과 묵주 등 천주교 관련 자료를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과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포교하여 세례를 주었다.

다음 해 오늘날 명동교회 자리인 명례동의 중인 김범우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만들었다.

천주교 신자 김범우가 1785년에 천주교회사 최초로 순교 당한 날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을 썼다.

1787년 가족 몰래 천주교로 돌아와 스스로 신부가 되어 예배를 주도하였다.

178910월 윤유일로 하여금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신부에게

제사에 대한 해석과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사 거부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천주교를 떠났다.

천주교를 다시 신앙으로 하다, 떠났다가를 반복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 벽파 세력이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사옥으로 226일 정약종 등과

'구서전법'·'밀통양인'·'잠모가환'의 죄를 뒤집어 쓰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풀었으며,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연구·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천진암 성지표지석

이승훈베드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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