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배지가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이 한양도성 가까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청나라에서 언제 자신을 임금에서 내릴 수 있다는 의심병으로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훗날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심지어 손자까지 사사(賜死)시키는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것에서 증명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더욱 불안감이 높아져 1637년 광해군을 제주도로 이배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면서 쓴 시가 전하고 있다. 제주에서 광해군(光海君)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