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인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면서
관리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대몽 항전에 나섰다.
원래 삼별초는 최우가 밤에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되어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말한다.
원종 11년(1270) 6월 1일에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 정부를 세우고 기세좋게 출발하였으나,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이탈로 군세가 줄어 들었다.
이에 배중손은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다. 진도는 화원반도와의 사이가 좁아 개경으로 세곡을 싣고 가는 조운선을
탈취하여 고려 정부의 재정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불안이 점점 더해진 몽골의 재촉으로 고려군과 몽골 연합군이
결성되어 삼별초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군사의 숫자와 무기에서 떨어진 삼별초는 고려군과 몽골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김통정의 지도로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김통정의 격려로 군사들은 안팎으로 성을 쌓고 해안에도 긴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한 후에 고려군과 몽고군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고려정부는 삼별초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통정은 몽고의 회유책이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거부하였다.
고려정부는 이 기회에 삼별초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제주도에 대한 총공격을 벌였다.
원종 14년(1273) 4월에 1만여 명의 고려군과 몽골군은 160여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제주도에 상륙하여 진도에서와 같이 기습 공격을 하였다.
진도에서 삼별초와 싸운 경험이 있는 김방경을 총사령관으로 하였기에
삼별초와의 싸움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제주도는 피빛이 되었다.
삼별초는 고려군과 몽고군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으나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뒤떨어져 후퇴(後退)할 수밖에 없었다.
김통정은 70여 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후퇴하였으나,
이미 싸움이 기울었음을 알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각자 살길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하였다.
이렇게 하여 삼별초는 1270년 6월 몽고에 대항한 싸움을 선언한 이후
만 4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가 1273년 4월에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 사람들의 자주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에 항몽유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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