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여름, 일제는 상해-항주 철도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해, 가흥 거리에는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이 김구 선생을 찾기 위해 오갔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에게도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던 김구 선생은 주푸청 며느리(주자루이) 친정 소유인 재청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도 안된 주자루이가 하이옌의 피난처로 안내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7, 8월 염천(炎天)에 친정의 여노비 한명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서남산령 고개를 넘는 모습을 보며 김구 선생은 감동했다.'고 에 적고 있다. 이어서 '우리 국가가 독립하게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