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김구 선생의 피난처, 재청별장

윤의사 2024. 5. 6. 15:11

1932년 여름, 일제는 상해-항주 철도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해, 가흥 거리에는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이 김구 선생을 찾기 위해 오갔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에게도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던 김구 선생은 주푸청 며느리(주자루이) 친정 소유인 재청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도 안된 주자루이가 하이옌의 피난처로 안내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7, 8월 염천(炎天)에 친정의 여노비 한명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서남산령 고개를 넘는 모습을 보며 김구 선생은 감동했다.'

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이어서

'우리 국가가 독립하게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글을 쓰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남북호(南北湖)가 굽어보이고 금우산을 등진 재청별장에 은신하였다.

1997년 하이옌현 인민정부에서 현급 문호보호단위로 확정한 재청별장이다.

1916년 건축된 난베이후의 첫 근대적인 건물이라는 재청별장은 중국과 서구의 건축이 결합해 우아함과 함께 사람이 살기에 편리함을 갖춘 품격있는 집이다.

1996년 독립기념관에서 건물을 다시 복원해 전시관을 설계, 제작해 2001년 5월 김구 전시관으로 개방되었다.

이곳에서 긴장의 연속이었던 김구 선생의 일생 중 그나마 평안함을 느끼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가흥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물심양면으로 김구 선생을 도운 것은 아마도 매헌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재청별장 입구
재청별장이 있는 남북호 표지판
남북호 전경
재청별장의 김구 피난처 표지
재청별장의 전경
김구 선생이 사용한 서재
1996년 6월 김구 선생의 2남인 김신 장군이 이곳을 방문해 남긴 글로 '음수사원 한중우의', 곧 '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뜻으로 김구 선생이 중국인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장래 한중우의를  발전시키는 방안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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