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경령 묘원

윤의사 2024. 5. 15. 12:20

중국근대사를 뒤흔든 송씨 세자매가 있다. 
1녀 송애령은 돈을 사랑한 여인, 2녀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한 여인, 3녀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다.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손문(쑨원)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쑹칭링) , 장개석(장졔스)과 결혼한

셋째 송미령의 세 자매를 두고서 흔히 하는 말이다.

첫째 송애령은 공상희는  공자의 직계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무부장이 된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조국을 사랑했다는 둘째 송경령(1892~1981년)은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인지 1981년 10월에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송경령 동지'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부여했고,  중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송경령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민주 국가로 이끈 손문과 1914년에 결혼해 11년동안 정치적 동지로서 함께 했다.

손문은 1925년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나는 국가의 일에 전념하느라 가산을 다스리지 못했다. 내가 남기는 책,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송경령에게 주어 이것으로 기념이 되게 하라. 나의 딸은 스스로 장성하여 자립하게 하라. 바라건대 각각 자애하고 또 나의 뜻을 이어갈 것을 부탁한다."

비록 손문이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영국·프랑스의 차관을 빌리려다가 실패한 이후에는 러시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외세 의존적 한계를 보였지만, 서구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국에 도입하고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국부라고 하겠다.

침착하고 사려 깊었던 송경령은 남편인 손문의 비서이자 혁명 동지로 함께 하였다.

손문의 저서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외국 정치가와 만날 때에는 통역을 해주면서 손문의 삼민주의에 공감하면서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중국과 한족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손문이 죽고난 후 장제스가 남편 손문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 국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 송경령은 마오쩌둥과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국공합작과 대일 항쟁의 시기에 송경령은 전쟁물자를 모아 공산당에게 보내는 일을 하면서 마오쩌둥을 도왔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으며, 중국민들을 공산주의 시스템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약 덩샤오핑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중국은 아직도 마오쩌둥이 추구한 농업국가에 머물었을 것이다. 더하여 마오쩌둥만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이다. 생전 목욕을 하지않아 비위생적이고 겉으로는 민중들을 엄청 생각하는 듯이 보이지만 안으로는 사치와 온갖 부정적인 일들을 저지른 사람이다.

권력을 사랑한 셋째 송미령은 국민당 1인자인 장제스와 결혼하였다. 

송경령이나 송미령이나 부인이 있던 남편으로 송가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다. 

송미령은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미국 루즈벨트에 청원하는데 큰 공헌을 해 한국의 독립을 문서화하기도 했으나 사치와 축재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송씨 세 자매, 좌측부터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영수불후(永垂不朽:'천추에 길이 빛나다'라고 할 정도로 중국인의 사랑을 받는) 송경령 능원에 있는 비석
송경령 비문
송경령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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