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만국공묘가 있는 송경령 묘원

윤의사 2024. 5. 12. 11:14

상해시 장녕구 송원로 21호 송경령능원에 위치한 만국공묘는 1910년-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어있는 공동묘지였다. 

만국공묘로 이장되기 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의 묘는 '징안스루(靜安寺路)'에 있었다. 

1966년-197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상하이의 도시 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정안사로'가 철거된 후 한인독립운동가 등

외국인 묘 가운데 일부가 이곳에 이장되었다.

이곳에 있던 애국지사의 묘들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점진적으로 우리나라로 봉환되었다.

1993년 8월 5일 노백린, 박은식,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등 5기가, 1995년 6월 21일 윤현진, 오영선 2기가 봉환되었다.

만국공묘가 위치한 송경령묘원을 공중촬영한 전경(출처:독립기념관)
외국인묘원 표지석
박은식 선생 묘지석(출처:독립기념관)
신규식 선생 묘지석
안태국 선생 묘지석

박은식 선생(1859 1925)은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다. 많은 역사책과 위인전을 써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박은식은 열 살 무렵부터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특히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힘써 일찍부터 학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일본의 침략이 날로 강화되자, 장지연, 남궁 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만들어 일제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백성들을 깨우쳤다. 한편 유교 개혁을 주장하고, 유교계를 친일파의 소굴로 만들려는 일제의 공작을 막기 위해 나섰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자, 박은식은 중국 만주로 건너가 국사 연구를 통해 구국 독립 운동을 펴 나갔다. 그리하여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같은 역사책과 위인전을 써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삼일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2대 대통령이 되어 독립 운동 세력을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의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규식 선생(1879 ~ 1922 )은 1879년 충정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2년 7월 2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졸업하고  육군보병 참위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 군대와 연합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분에 죽음으로 항거하려다가 실패하고 오른쪽 눈만 실명되었다.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에 항의하다가 면직되었다. 

이후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광산산업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쌓은 것을 바탕으로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활동을 펼쳤다. 1910년 한일합방에 다시 울분을 참지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다 나철에 의해 구조되었다. 

1911년 봄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쑨원을 비롯한 중국의 혁명가들과 가까이 지내며 산해혁명에 참여하였다. 1912 7 4일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들을 규합해 동제사를 조직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부의장,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에서 분열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먹지 않고, 말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다가 1922년 9월 25일(8월 5일, 음력) 순국하였다. 정부에 의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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