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0월26일 오늘의 역사, 청산리에서 일본군 격파

윤의사 2024. 10. 26. 10:31

10월26일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께서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1979년에는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전대통령이 시해되었다.

혹자들은 김재규를 민주화의 영웅인양 추켜세우는데, 전혀 아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에 대한 질책을 받고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시해를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총에 탄환이 몇 발 들었는지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전혀 계획한 것이 아닌 즉홍적인 것이기에 자신의 권총에 장전된 탄환의 숫자도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김재규를 추앙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날이다.

김좌진장군은 뛰어난 지략으로 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독립 전쟁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일제의 폭압에 억눌려 지내던 우리 겨레에게 용기를 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자는 명여, 호는 백야이다.

 

김좌진은 부유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열다섯 살 때에는 자기 집 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준 뒤 모두 풀어 주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육군 무관 학교에 들어갔고, 애국 지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국을 위해

일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호명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90여 칸짜리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고 자기는 초가집으로 나가 살았다.

또한 대한협회의 홍성지부와 기호흥학회를 만들어 백성들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1909년에는 <한성신보> 간부를 맡고,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만든 뒤 오성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교육 운동만으로 나라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김좌진은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자금을 모으기 위해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 김좌진은 비밀 단체인 광복단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1918년에 김좌진은 서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한정의단에 들어가 군사 책임을 맡고,

이듬해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 부대가 되었다.

이어 사관 연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는데 힘썼다.

이즈음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이 독립군을 싹쓸이하겠다며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시작되어 26일 새벽까지 약 1주일 동안 어랑촌, 천수평, 완루구 등

간도에 10여 차레 출병한 일본군 싸운 전투이다.

김좌진과 나중소•서일•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과 대한신민단 예하 독립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싸워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치르며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백운평의 고개마루와 25km에 이르는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야스가와와 야마다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갑산촌으로 이동하였다.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김좌진과 이범석 부대는 일본군 이동 정보를 이용해 어랑촌에서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이끄는 27기병연대를 홈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협조로 전투를 벌이다 탄약 부족으로 철수하였다.

25일에 고동하 계곡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한 모닥불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지만, 독립군은 오히려 반격을

가해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의 성과에 대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가노 연대장 이하 1,600명을 사살했다'고

서술하였고, 독립군을 이끈이범석 쓴 자서전에서는 3,300명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갔다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곧 만주로 되돌아왔다.

김좌진은 군사 단체인 신민부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다, 옛 부하인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김좌진 장군
독립군의 피 묻은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