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사학(私學)인 경당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최초의 관학(官學)인 태학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시켰다’
라는 기록 이외에는 없다.
그러나 점제현 신사비, 관구검 기공비, 광개토왕비 등으로 보아 일찍부터 한자의 사용이 있었으며,
일종의 교육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4세기 말 이후 5세기에 이르는 고구려의 정치 상황은
교육이라는 비군사적인 영역에 주력할 때가 아니었다.
더욱이 철저한 계급(신분) 사회인 고구려가 평민층의 자제에까지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당의 성격을 교육적인 면보다는 군사적인 차원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경당의 입학 연령이 미혼의 남자층(청소년)이었고,
독서(송경:誦經)와 습사(習射:군사 훈련과 군사의 배출)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어,
이것은 정복 사업을 원활히 하는 데 기반이 된 ‘군사적 의미’의 기관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화랑도와 그 성격이 비슷하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남자들이 만 20세면 누구나 군대에 가는 징병제(국민 개병제)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경당과 같은 군사 제도로써 병력의 확보가 가능했고
이것은 영토 확장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경당을 통한 한문과 유학의 이해는 국민의 지식 함양과 계몽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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