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경복궁

경복궁 경회루

윤의사 2012. 10. 7. 12:19

경회루는 국가의 중요한 잔치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태조 때 처음 만들어졌으나,

습지에 연못을 만들어 작은 집을 지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태종은 박자청에게 명하였다.

박자청은 신분은 미천했으나,

한성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조판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태종과 박자청은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못을 크게 파고 못 속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2층의 다락집을 지었다.

 

그 후 세종과 성종 때 개수공사를 하였으며,

특히 성종 때는 돌기둥에 용머리를 새겼는데, 어찌나 생동감이 있었던지

유구국의 사신이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회루는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건축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불이다.

흥선대원군은 불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 두 마리의 청용을 만들어 연못에 넣었다.

1997년 준설공사과정에서 한 마리만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바깥쪽의 돌기둥은 네모로 땅을, 안쪽의 돌기둥은 둥글게 만들어 하늘을 나타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운데는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금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의 차지다.

세 칸은 천지인(天地人)을 나타낸다.

들어열개(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 창호가 있어 창호를 내리면 독립된 방이 되며,

창호를 올리면 사방이 탁 트여 경치를 감상하게 되어 있다.

경회루의 창틀은 낙양으로 만들어 사방의 경치를 액자 속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 듯 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방은 12칸으로 만들어졌다.

1년 열두 달을 나타낸다.

두 번째 방의 바깥 부분의 기둥은 모두 24개이다.

24절기를 나타낸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는 데도 주역의 원리를 이용하였다.

각 방의 천장 꽃무늬는 신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우리가 흥에 겨워 돈을 마구 쓰는 모양새를 ‘흥청망청(興淸亡靑)’이라고 한다.

연산군 때 궁궐로 뽑혀온 기생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흥청과 함께 놀다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여 생겨난 말이다.

 

2층 누각에서는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의 북악산이 한 눈에 보인다.

중종반정을 통해 임금이 된 중종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단경왕후 신씨와 헤어져야 했다.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박원종 등 중종반정의 주역들이 신수근에게 반정에 함께 할 것을 요청했으나,

신수근이 고사하였기에 역적의 무리로 인왕산의 사가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중종은 단경왕후를 그리워하여 경회루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보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단경왕후는 인왕산에 자신이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고 하여,

경회루에서 보이는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하지만 중종은 단경왕후를 사가로 물린 후 계비 장경왕후 윤씨와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비롯하여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수많은 후궁을 들였으니 단경왕후를 그리워 한 것은 진실이 아닌 민가의 전설이 아닐까 한다.

 

경회루로 들어오는 문은 세 개다.

오른쪽 문이 임금이 출입하는 문이다.

임금이 출입하는 문은 규모도 크고, 치미까지 있어 다른 두 개의 문보다 위엄이 있다.

임금이 출입하는 다리의 장식은 근정전의 장식과 비슷하다.

그런데 입이 떼어졌다. 어떤 책에서는 6.25 전쟁 중의 상흔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총탄 자국같지는 않고 누군가 고의로 떼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수정전에서 바라본 경회루

 

 

둥근 안기둥과 네모진 바깥 기둥, 각각 하늘과 땅을 나타낸다.

 

 

임금과 고위 관리들의 자리인 가운데 방, 세 칸으로 천지인을 나타낸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한 칸이다.

 

 

두 번째 방으로 12칸이다. 1년 12달을 나타낸다.

 

가운데 방의 천장장식

 

 

두 번째 방의 천장장식

 

 

세 번째 방의 천장장식,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있던 곳이라서 천장의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낙양 속의 치마바위, 단경왕후의 임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 곳이다.

 

 

낙양 속의 근정전, 이곳에서 보면 임금과 왕비의 정전이 일렬로 배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임금이 뱃놀이도 하였다.

 

 

임금이 출입하는  자시문, 다른 문과 달리 치미가 위엄있게 자리하고 있다.

 

 

관리가 출입하던 문, 규모도 작고 문의 위엄도 없어보인다.

 

 

총탄에 맞았다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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