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궁궐 담을 넘어온 ‘고상한’ 말들
말에도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다. 강한 집단에서 쓰이는 말이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는 우리나라로 들어왔지만 우리말은 일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두 나라간에 작용하는 중력이 어디가 큰지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도 영어는 우리에게 흘러오는데 우리말은 미국으로 잘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나라들의 말이 우리나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땠을까. 당연히 이런 이치로 중국 한자어는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우리말은 중국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수많은 몽골어가 고려로 들어왔지만 고려어는 몽골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말이 한류란 이름으로 중국이나 몽골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중력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 이런 현상이 가장 크게 일어난 곳을 보자면 궁중과 민간 사이다. 궁중어와 민간어 역시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여 민간어는 궁중으로 잘 침투하지 못하지만, 궁중어는 궁궐 담을 넘어 민간으로 흘러나온다. 이런 문화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특성이 아니다. 중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대개 인간이 사는 국가와 사회에서는 비슷하다. 초기 한자어가 수입될 때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의 왕실에서 쓰던 어휘가 우리나라 왕실로 들어오고, 그런 뒤 민간에서도 슬금슬금 쓰였다. 이처럼 우리말이든 한자어든 말의 원천은 주로 궁중인 경우가 많다. 궁중에서 쓰이는 말이야말로 인간들이 쓰는 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중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용어이기 때문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말을 따라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 중국의 왕실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러하다. 군(君) → 왕자, 보모 → 궁중 관직, 양(孃) → 왕의 모후, 부인(夫人) → 제후의 아내. 즉 왕의 아내는 후(后), 제후의 아내는 부인(夫人), 대부의 아내는 유인(孺人), 사(士)의 아내는 부인(婦人), 서민의 아내는 처(妻)라고 했다. 제사 지낼 때 지방에 ‘유인(孺人) 아무개’라고 적는 것은 대부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인(夫人)과 부인(婦人)이 다르다. 조선의 궁중 관리나 궁녀들을 통해 민간으로 흘러나온 궁중어는 다음과 같다. 거덜(나다) → 조선시대에 가마나 말을 맡아보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맡아보던 하인, 나리 → 왕자, 구이 → 왕이 먹을 고기나 생선을 구운 것, 기별(奇別) → 소식, 나 → 왕이 왕비나 후궁에게 자신을 가리켜 부르는 1인칭 호칭, 나리 → 왕자를 부르는 호칭, 납시다 → 왕이 나오신다, 너비아니 구이 → 왕이 먹을 불고기, 다(茶) → 왕이 먹을 숭늉이나 차, 다방(茶房) → 차(茶)를 담당하는 궁중 관청, 두발(頭髮) → 왕의 머리칼, 듭시다 → 왕이 들어가신다, 마누라 → 세자빈에 대한 존칭어, 면(麵) → 왕이 먹을 국수, 미안하다 → 서운하다, 술래 → 궁중 순라군, 아니꼽다 → 마음에 끌리지 않다, 적(炙) → 왕이 먹을 느르미·우육(牛肉: 쇠고기)·라지·파·버섯 등을 꼬치에 끼워서 타원형으로 부친 것, 지 → 왕의 소변 또는 요강인데 민간에서는 아이의 오줌을 일컫는 말, 차비(를 하다) → 궁중 잡역 노비, 침(枕) → 왕의 베개, 탕(湯) → 왕이 먹을 국, 편 → 왕이 먹을 시루떡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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