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궁궐 담을 넘어온 ‘고상한’ 말들 ②
궁중어 중에서는 일반인이 따라 쓰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면 궁중이 아니면 전혀 쓰이지 않는 말도 있기 마련이다. 즉, 담을 넘어올 만한 궁중어라면 대부분 일반 관리들에게 노출되는 것들인데, 나머지 궁중어는 외부인들에게 결코 노출될 수 없는 은밀한 말들이다. 이런 점에서 궁중어를 일종의 은어로 볼 수도 있다. 궁중어라면 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오늘날 접할 수 있는 궁중어는 조선 궁중어밖에 없다. 이마저도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궁녀나 내관들이 민가로 나오면서 알려진 것들이다. 고려 궁중어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어휘가 드물지만, 고려 왕조의 멸망과 함께 궁궐 밖으로 나온 고려 궁중어 중 상당수는 민간으로 흘러나와 우리말과 뒤섞이거나 조선 궁중어로 옮겨갔을 것이다. 궁중어가 생긴 가장 큰 원인은 왕이라는 지존의 인물에 관련된 말을 특별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신전(도관·사찰·성당·교회·신당 등)에서 신을 받들기 위해 쓰이는 종교어와 마찬가지로, 궁중어 역시 왕권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궁중어를 살펴보면서 궁중 은어가 어떻게 쓰였는지 느껴보자. 감(鑑)하다 → 왕이 보시다, 건개 → 반찬, 과거(過擧)하다 → 왕이 실수하다(지나친 행동을 하다), 과인(寡人) → 공적(公的)인 자리에서 왕이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표현, 기노(起怒 : 震怒)하시다 → 왕이 노(怒)하시다, 기미보다 → 먼저 맛보다(왕, 왕비가 드는 음식은 먼저 수라상 머리에서 임금이 수라를 들기 전에 반드시 상궁들이 시식했다), 나인(內人) → 궁궐 안에서 대전(大殿)·내전(內殿)을 가까이 모시는 내명부(內命婦)의 총칭, 낭(囊) → 왕의 엽낭(葉囊) 즉 복주머니, 대루리 → 다리미, 동달이 → 왕의 동을 왕의 고유색(노랑과 보라)이 아닌 다른 색으로 단 어린아이 저고리(동은 저고리로, 왕의 저고리에는 독특한 색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색동이라고 하며, 색동저고리는 이런 왕의 복식에서 유래했다), 두굿겁다 → 기쁘다, 뫼어라 → 왕을 모시어라(가지고 오라), 물어주다 → 왕이 하사(下賜)하다, 미령(靡寧)하시다 → 왕이 편찮으시다, 보자(褓子) → 보자기, 사색(辭色) → 왕의 표정 또는 기분, 상(常)없다 → 버릇없다, 수진이 → 어린새끼를 잡아다가 집에서 길들인 매, 상(上) → 왕을 가리키거나 부를 때 쓰는 명칭, 엄색(嚴色) → 왕이 화가 난 표정, 웃전 → 왕이 대비를 가리켜 말하는 2인칭 호칭, 조리개 → 장조림, 조치 → 왕이 먹을 찌개, 청포(淸泡) → 왕이 먹을 묵, 초려(焦慮)하다 → 왕이 몹시 걱정하시다, 치사(致詞) → 왕에게 드리는 축하문, 침수 드오시다 → 왕이 주무시다. 탄일(誕日) → 왕의 생신(生辰)날, 탕제(蕩劑) → 왕이 먹을 약, 통기(通氣) → 왕의 방귀, 행보(行步) → 왕이 걷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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