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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목포에서 인천까지 서해안 고속국도가 건설되었다. 고속국도를 달리다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다를 가로지른 서해 대교와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부분 관리의 반대에도 12척의 배를 가지고도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미래를 보는 혜안이 보이는 듯 했다. 장군이 바다를 중시했듯이 오늘날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하니 말이다.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에는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다. 숙종 32년(1706)에 이 고장 선비들의 힘으로 사당이 세워졌고, 다음 해 왕이 현충사란 현판을 내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잠시 쇠락했으나,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국민들의 뜻을 모아 1932년 6월 5일에 다시 지어졌다. 오늘날처럼 현충..

임칙서가 아편을 소각

중국은 편무역을 통해 영국(동인도회사)에 비단·차·도자기를 수출하고, 영국에서 모직물·면직물·은을 들여와 항상 흑자무역을 이루었다. 적자를 보는 영국에서는 흑자로 돌리기 위해 삼각무역을 추진하였다. 즉 청나라로 들어간 은을 가져오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로 밀수출하였다. 청나라에서는 아편중독자가 사회문제가 되었고, 은의 대량 유출이 이루어졌다. 임칙서는 황제 도광제의 아편을 엄금할 것을 진언하고 아편을 막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특정 사건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은 특별 관리)이 되어 광동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았다. 그는 "아편이 근절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2만여 상자,1000t이 넘는 어마어마한 아편에 ..

해우소(解憂所)가 화장실이 된 까닭

경봉(鏡峰)스님(1892-1982)이 양산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머물 때 해우소(解憂所)라고 써서 화장실에 건데서 유래되었다. 당시 소변을 보는 곳은 휴급소(休急所)라고 써서 달았는데, 이 말은 널리 쓰이지 않는다. 경봉스님은 1953년에 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되었는데, 아마 이 무렵에 해우소란 명칭을 지으셨다. 경봉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법문(法門)을 통해 해우소라고 한 이유를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야!그런데 중생들은 급한 일은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은 바쁘다고 해!휴급소라고 이름한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 쉬어 가라'는 뜻이야!그리고 해우소라고 한 것은 '쓸데없는 것이 뱃 속에 있으면 ​답답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는데, 그것을 다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