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 5일, 나철과 오기호가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포명서를 발표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며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군사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게 했다.
나철과 오기호, 이기, 김인식 등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본의 인사들을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에 나철과 오기호는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데 앞장선 친일 관료인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의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오적암살단'을 조직했다.
1907년 3월 25일, 나철과 오기호는 폭탄상자를 외국인이 보낸 소포로 위장하여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배달하려고 했으나, 중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위해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일본은 을사오적 암살을 주도한 나철, 오기호, 이용태와 민형식에게 내란죄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나철과 오기호는 각각 유형 10년과 5년, 이용태와 민형식은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나철과 오기호는 1907년 12월 7일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석방됐다.
일본이 천조대신을 형제로 묘사하는 '동근동조론'을 내세워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자, 1909년 2월 5일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받들어 한민족의 정기를 일깨우고 민족의 자주성과 단결을 이루려고 대종교 포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빌미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나철은 대종교의 본부를 만주로 옮긴 뒤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교육에 힘입어, 청산리 대첩의 주력 부대였던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기도 하였다.
나철은 일제의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를 탄압하자, 이에 항거하여 1916년 8월 15일 유서를 남기고 구월산 삼성단에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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