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노병균의 3남으로 태어났다. 21세 되던 1895년에 내무대신인 박영효의 주창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신식군사학을 배우고 1900년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한국 무관학교 보병과 교관과 육군무관학교장, 육군 연성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한 기념으로 노백린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연회를 할 때 이완용 등 매국노 대신들에게 ‘워리 워리’라고 하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개 같은 놈’이라는 의미로 개를 부르듯이 부르자,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칼을 들고 덤벼들 때 노백린도 칼을 빼 들어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이토가 하세가와를 말려 겨우 진정되었다. 이는 노백린의 대쪽 같은 성품과 기백을 보여주는 것이다.
1907년 8월 1일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군대 해산으로 군복을 벗은 후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1915년 7월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노백린은 하와이 미국 사령관의 묵인하에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또한 공군이 장래 전투에서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해 1920년 5월 미국 본토 윌로우스(Willows)에 한인사회의 후원을 받아 한인비행사학교를 개교해 1923년에는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비행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19년 이후 성립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있다가 1924년 5월 30일 군무총장에 임명된 정통 군인이었다. 1925년 박은식 선생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자 국무총리로
노백린은 1926년 1월 22일에 지병으로 망명지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 단칸방에서 순국했다. 병환 중임에도 “정복 입고 남대문에 입성”하고 싶다는 소원을 입버릇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노백린은 가족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기에 그의 아들 노태준 역시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치되었고, 차녀 노순경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공로를 인정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장군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치돼 있다가, 1993년 임정요인 유해 봉환 때 고국에 돌아와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장됐다.(사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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