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이 처음 지어질 때 건축되었으며,
전각의 명칭도 성종의 명령에 의해 서거정이 지어올렸다.
양화당은 세 번의 화재를 겪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30년(1830)에 소실되었다.
순조 33년(1833)에 다시 지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비의 침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곳에서 내명부의 어른들이 손님을 접대하던 장소이며
임금도 자주 들렀던 곳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명종 20년(1565)에
임금이 이곳에서 독서당 문인들을 친히 시험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인 인조 13년(1637) 1월에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적인 항복을 한 인조가
이곳에 머무르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정면 6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양화당의 동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 큰 바위를 제거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위와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한 것이
바로 양화당이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인조의 한이 아직도 남아있을 양화당
동쪽의 바위때문에 다른 전각보다 월대가 낮다
양화당 동쪽의 바위 표면, 자연에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이를 이용하는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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