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국도 여주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37번 국도를 따라 이천 방향으로 4.4KM를 가다보니 영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영릉이 나왔다.
원래 영릉은 남부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에 있었다. 세종대왕이 항상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옆에 있고 싶다고 하여 태종의 묘인 헌릉 옆에다가 모신 것이다. 그러나 묘지의 위치(位置)가 좋지 않다고 하여 예종 때에 묘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예종의 명을 받은 관리들이 터를 잡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아무리 찾아도 좋은 터가 보이지 않아 어느 덧 여주에 칭성산(지금의 영릉이 있는 산)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 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어 가보니 묘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이 있었다. 이미 천하 명당이기에 이계전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묻히기 위해 잡아놓은 묘자리였다. 이계전도 임금의 묘자리를 옮긴다고 하니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가 이곳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곳이 얼마나 묘자리가 좋았으면 조선시대의 운명이 백년을 더 지속시킬 수가 있었다고 한다.
영릉의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세종대왕의 동상과 재실이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 기념전인 세종전과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각종 과학 발명품이 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 천문과학기기인 간의,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등이 전시(展示)되어 있었다.
앙부일구는 시계의 모형이 솥을 받쳐 놓은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림자를 받는 면이 오목하다고 해서 오목 해시계로도 불리워진다.
세종전에는 그림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업적(業績)을 전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국경선을 확정했다든지, 가장 큰 업적인 한글의 창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세종전을 나와 릉으로 향하다 보니 자격루가 보였다.
물시계라고도 불리는 자격루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시계라고 할 수가 있다. 자격루 옆에는 서양의 카스틸리오네가 발명한 것보다 200년 앞서 만들어진 측우기가 있었다.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측우기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에 설치한 수표도 보였다.
훈민문을 지나니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릉에서 흐르는 물을 받기 위한 것이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과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자각을 지나면 봉분이 나타난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 12가지의 동물을 새겨 방향(方向)을 표시하고 있었다.
봉분 앞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임을 알려주는 혼유석이 있고,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는 양과 호랑이를 돌로 조각(彫刻)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이를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라고 한다.
그 앞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다.
영어의 열풍이 불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옛날의 강력했던 거란족이나 여진족이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세종대왕이 지켜보다
지금이 몇 시일까? 해가 있어야지.
정자각 전경
영릉 전경(우리가 상석이라고 하는 것을 왕릉에서는 혼유석이라 한다)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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