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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지진이 일어났나요?

윤의사 2011. 3. 14. 07:39

지난 11일에 이웃 나라 일본에 9.0의 지진과 해일이 발생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지리적으로 환태평양조산대에 속해있는 일본은

항상 지진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이에 비해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진도(震度) 3도 이하의 약한 지진이 발생한 적은 있어도 일본과 같은 큰 지진은 없었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지진에 관련된 기록이 많이 보이며 그 피해도 매우 컸다.

조선 영조 때 홍봉한(洪鳳漢) 등이 엮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면 큰 지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신라 유리왕 11년(34)에 경주에서 땅이 갈라지면서 물길이 치솟았던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의 고종 35년(1898)까지 지진이 1900여 차례나 발생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최대 피해 기록은 신라 혜공왕 15년(779)에 일어난 지진으로, 경주의 집들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 충선왕 3년(1310)에 지진이 났을 때는 수령궁에 있는 임금의 자리인 용상이 반으로 갈라졌으며, 물이 치솟고 담장이 무너져 행인이 깔려 죽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13년(1519년) 5월15일의 지진 재해를 전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유시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뢰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떨어져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노인들은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


지진이 일어날 때면 사람들은 세상이 끝날 것이라 하여 술과 음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재산을 날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말세라고 할 정도로 큰 지진이었던 듯 하다.


지진과 함께 발생하는 것이 화산 폭발이다.

북쪽에 있는 백두산, 제주도 한라산, 울릉도 성산봉이 모두 화산이다.

이 화산들은 지금은 화산 활동을 멈춘 화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멀리는 천 년 전, 가까이는 3백 년 전까지 폭발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고려 목종 5년(1002)과 10년(1007) 두 차례나 화산이 폭발했다고 한다.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할 전후에 대규모로 화산이 폭발하였다고 한다.

논의가 분분하지만 발해가 멸망한 원인이 바로 백두산의 화산 폭발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원래 백두산의 높이는 3700m였다.

그런데 화산이 폭발하면서 1000m 정도가 날아갔으며,

화산재의 일부는 멀리 일본까지 날아가 5cm까지 쌓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현종 9년(1668)에 함경도에 재가 부렸다는 상소에 대해 좌의정 허적에세 물으니,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붉은 거울과 같았습니다. 다음 날에도 붉은 기운이 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재가 뿌리고 붉은 기운이 돈 것은 분명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산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마지막으로 화산 폭발이 있었다.

‘오시(午時)에 천지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붉고 노란 불길이 먹구름과 더불어 솟아나는데 유황내가 코를 막고 마치 술 속에 들어있는 듯 뜨거운 열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사경(四更:새벽 2시-4시)쯤에 이르러서야 멎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들판이 울퉁불퉁 숯밭처럼 되어 마치 조개를 굽는 불판 같았다’며 가까이서 화산 분출을 지켜본 기록이 남아 있다.


천재지변인 지진과 화산이 발생하면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여 임금과 지진의 피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은 반찬 수를 줄이고 술과 가무를 줄이고 감옥문을 열어 죄수를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고 행동을 주의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