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죽산이며, 계홍·안담살이·안진사라고도 불리운다.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이며 전라남도 보성에서 아버지는 달환(達煥)의 아들로 고종 16년(1879)에 태어났다. 매우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 의병을 일으키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차 심화되어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면서 주인에게 의병을 일으킬 자금으로 돈, 곡식, 삼베, 비단을 요구하였다.또한,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安極)의 묵계 아래 안극의 집에 침입해서 그의 무기와 재산을 바탕으로 동지들을 모아 나갔다. 1908년 2월 관북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병력은 70명으로 불어났다. 먼저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강성인이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줌으로, 그를 참형시키고 군기를 엄히 하였다. 이로써 의병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담살이’란 전남지방 방언으로 ‘머슴살이’를 말한 바, ‘안담살이’란 별칭의 안규홍이 담살이 출신으로 100년 전, 그 무렵 숱한 유생을 젖히고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고, 그것은 장군에게 분명히 남다른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의병 부대의 조직으로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軍需將)으로 편제하였으며, 휘하에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의 용장이 활약하였다.
2] 파청대첩
1908년 2월 일본군이 보성군 조성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평소 이 일대의 산악지리를 자세히 파악, 파청의 험한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두었다.미도(米戶)와 히라이(平井)의 2개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들이닥치자 일제히 맹사격을 가하여 적군을 괴멸시킨 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호군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고자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편,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1908년 8월 24일 진산에서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또,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조직을 정비한 후에 1909년 3월 25일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대첩이다.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는 등 그 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장흥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니 적에게 의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토왜(土倭)의 제거가 시급함을 깨닫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병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1909년 7월 일단 의병을 해산하였다. 같은 해 9월 25일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富石)부대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된 뒤, 대구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으로 1909년에 옥사하였다. 1923년에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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