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2009. 11. 15 박혜민 기자의 글입니다.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 미실에 대한 관심이 높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미실의 모습이다.
‘용모가 절묘하며 풍후함은 옥진(미실의 외할머니·법흥왕의 후궁)을 닮았고, 환하게 밝음은 벽화(미실 아버지의 할머니·법흥왕의 후궁)를 닮았고, 빼어나게 아름다움은 오도(미실의 외증조할머니·법흥왕의 후궁)를 닮아서 백화의 신묘함이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수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옥진이 “이 아이는 우리의 도를 일으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화랑세기> 역주해본 ‘11세 하종’ 편에 나오는 미실에 대한 묘사다. 미실은 신라의 대표적인 경국지색이다. 대대로 왕의 여자가 돼 온 가문(대원신통) 출신으로 왕후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미실의 남편은 왕과 씨가 다른 형제인 세종이었다. 미실은 세종의 아내로 살면서 세 명의 왕을 섬겼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왕후의 자리엔 오르지 못했다. 미실과 사다함의 못 이룬 사랑, 그녀가 처음 궁에 들어간 건 세종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명에 따라 세종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소태후는 경쟁 가문 출신인 미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곧 쫓아냈다. 쫓겨난 미실은 5대 풍월주 사다함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사다함이 가야와의 전쟁에 나간 사이 미실은 다시 지소태후의 명을 받고 궁으로 들어간다. 세종이 미실을 지나치게 그리워하자 태후가 아들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미실은 결국 세종과 결혼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실을 사랑하던 사다함은 병에 걸려 사망했다. 미실과 사다함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신라인들은 오래 기억했다 한다. 3대 왕 총애 업고 권력 정상에 미실은 세종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왕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그를 진흥왕은 후궁으로 삼았다. 미실은 문장을 잘 지었다. 왕이 조정에 나가 업무를 볼 때면 옆에서 문서를 읽고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왕이 출입할 때면 반드시 동행을 했으니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친동생 미생을 비롯한 친인척은 미실 덕분에 출세했다. 미실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원화 자리에도 올랐다. 진흥왕이 미실의 청을 받아들여 29년 전 폐지됐던 원화 제도를 부활시킨 탓이다. 진흥왕의 총애가 깊어지자 미실은 방탕해졌다. 세종의 부하 설원랑뿐 아니라 미생과 정을 통했고, 진흥왕의 아들인 태자 동륜에게는 색공을 바치기도 했다. 동륜이 개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실의 부정은 탄로났다.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 세종에게 돌아간다. 세종은 평생 미실을 감싸주던 인자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미실은 그녀를 못 잊던 진흥왕과 미실을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던 사도왕후의 노력으로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진흥왕은 43세에 사망하는데, 사도와 미실은 이를 비밀로 한다. 미실은 금륜태자에게 색공을 바치고, 금륜은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진지왕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즉위 3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진지왕 폐위는 사도와 미실이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미실은 화랑을 이끌던 국선 문노, 신라의 영웅 거칠부의 협력을 얻어 거사에 성공한다. 미실은 동륜태자의 13세 아들을 진평왕으로 세우고, 다시 그에게 색공을 바쳐 그후로도 10여 년간 권세를 누린다. 말년에 절에서 기거하다 사망 말년의 미실은 영흥사로 거처를 옮겼다. 연인 설원랑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설원랑은 미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자신이 대신 걸리도록 해달라고 기원한 끝에 먼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미실의 사망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미실의 자녀는 모두 8명이다. 세종과의 사이에 하종·옥종, 동륜태자와 사이에 애송, 진흥왕 사이에 반야·난야·수종, 설원랑과 사이에 보종, 진평왕과의 사이에 보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