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호랑이 무덤

윤의사 2010. 1. 1. 16:41

-의호총비ㆍ금효자설화

 

2010년은 경인년이다. 경인은 오행으로 흰색과 금을 듯한다고 하여 올해를 백호랑이라고 좋은 년도라고 말한다.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지만 모두 그런 풍설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2010년이 호랑이 해이므로 호랑이와 얽힌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금산 밑에 한 무덤과 의호총이란 비석이 서있다. 비석표면은 의호총(義虎塚)이라 하고, 뒷면에는 『癸亥七月日因巡營分付立故今處士師夏康熙子天崩有虎終喪三日而死(1743년 계해 7월에 순영의 분부에 의하여 세웠으며, 금사하가 1720년(康子)에 국상을 당하여 호랑이와 같이 3년상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가 3일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주천 금산 아래에는 금사하라는 학문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친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시작했다.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마저 갑자기 병이 나서 생명이 위급하다는 전갈이 왔다. 효자인 금사하는 약을 지으려고 읍내인 주천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로 달려갔다. 상류에서 쏟아진 폭우로 배를 건널 수 없게 되자 강 건너를 바라보며 크게 통곡을 하였다. 이 때, 짙은 어둠 속에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눈앞이 캄캄해진 금사하는 호랑이에게 크게 호통을 쳤다.

"나는 지금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여 강 건너 주천에 가서 약을 지어다 드려야 한다. 내가 어머니께 약을 지어드린 후에 나를 잡아먹던지, 마음대로 하여라,"

이에 호랑이는 고개를 숙인 채 꼬리를 흔들면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여 금사하가 호랑이 등을 타고 거센 물결을 가르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약을 지은 금사하를 기다리고 있다가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으며, 어머니의 병환은 금사하의 지극한 효성으로 완치되었다. 다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시묘를 살았는데 밤만 되면 강을 건너 주었던 호랑이가 찾아와 3년 동안이나 금사하와 함께 묘를 지켜 주었다고 한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승하하여 충효 사상이 지극한 금사하는 베옷을 입고 주천 망산에 올라가 궁궐을 향하여 삼년상을 지냈는데, 이때도 밤만 깊어지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금사하와 함께 밤을 지세웠다고 한다. 숙종 임금의 국상을 마친지 얼마 후, 호랑이는 늙고 병이든 나머지 금사하집 마당에 와서 쓰러져 죽자, 금사하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한 후에 고이 묻어 주고 매년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호랑이가 죽은 지 23년 후인 1743년에 강원도 관찰사를 보필하는 정3품 벼슬인 순영중군이 주천에 왔다가 호랑이의 충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라는 분부를 하니, 그 비석이 바로 의호총비이다. 그 후 주천 사람들은 호랑이무덤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 이 산을 '금산'이라 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금사하와 호랑이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으며, 나라에서는 금사하에게 신일리 금산 주위에 있는 사방 10리의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여 그의 효행과 충성심을 기리고 매년 호랑이 묘에 제사를 올렸다. 금사하는 숙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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